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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Hunter Jun 11. 2024

역린逆鱗

내가 미치는 이유

夫龍之爲蟲也,柔可狎而騎也;然其喉下有逆鱗徑尺,若人有嬰之者,則必殺人
용이란 짐승은 길들여서 탈 수 있다.

그런데 용목 아래에는 한 척짜리 거꾸로 된 비늘이 있어,

만일 그것을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人主亦有逆鱗,說者能無嬰人主之逆鱗,則幾矣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역린이란 것이 있다.

군주를 설득하면서 그것을 건드리지 않을 능력이 있다면,

그는 설득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한비자, 세난(說難)


용 몸에는 여든한 개 비늘이 있는데 그중, 목 아래에는 결을 거슬러 난 비늘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서양 드래곤에게는 없는 것으로 동양에서 말하는 용龍에게만 있다고 하는데요. 예전에는 왕이나 지배권력을 직접 입에 올릴 수 없으니 용이라고 비유하면서 행여라도 그 비위를 건드리지 말라는 은유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린은 주로 윗사람에게 쓰는 말이니 저도 나이가 들고 꼰대력이 올라가면서 역린이 하나 둘 몸에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이 제 성격에 하나 둘 더해지는 것이 느껴지니 스스로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이것을 매번 건드리는 인간들에게는 나도 모르게 급발진을 하고 맙니다.


제 역린을 하루에도 수십 번 건드리는 사람이란 바로 가족입니다.


아내랑 어머니는 그나마 내가 지랄하려는 기운이 보이면 역린을 툭 쳤다가도 어두워지는 표정에서 눈치를 채고 피하지만 아버지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를 만들어 준 당사자이기에 아버지가 가진 역린이랑 제 역린은 비슷한 구조이기도 해서 내가 미쳐 눈이 돌게 하는 데는 세상에 아버지만큼 전문가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학력 컴플렉스가 심합니다. 그러니 서울대 근처에도 가지 못할 실력을 가진 아들을 평생 때리고 원망하며 보낼 수밖에요. 이런 환경이다 보니 저는 강제로 아버지 컴플렉스랑 매우 흡사한 구조를 마음속에 건설하게 됩니다. 일종에 유산인 셈이죠. 이토록 공부 못하는 아들은 평생에 죄인이며 아버지께는 원통할 노릇이고 수치스러운 존재입니다.


지금 나이가 몇 개인데 아직도 서울대 타령이냐 싶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모든 이민 생활을 접고 서울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면 아버지는 대환영입니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를 간다면 우리 가문에 최고 영광이겠지요.


그래, 서울대학에 무슨 학과를 가시려고? 또 하버드에 가서는 무슨 전공을 할 것인가?


그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서울대학이 있으니 가는 것입니다. 위 같은 질문을 하는 분은 아직도 우리 학벌 컴플렉스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학위는 수단이 아니라 최종 목적지이며 인생 목표입니다.


내가 이 나이에 공부를 하다 죽는다면 아버지는 내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겠지만 서울대를 가려고 발버둥 치다 얻은 죽음이니 그 묘비는 아버지에게 가장 값질 것입니다. 지금도 토요일 일요일은 대학원에 가서 온종일 공부하라는 것이 그분 마지막 당부입니다.



호기심에 시작한 정신분석 공부는 이제 대학원에서 심리 상담학을 공부하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다 좋은데 낮에는 회계사로 밤에는 유도 코치로 클럽을 운영하는 지금 삶에 학생이라는 신분을 더하게 되니 가뜩이나 아침에 서지도 않는 인생이 더 우울해집니다.


안 그래도 꽁지가 타들어 가도록 일이 많은데 몸이 말이 아닙니다. 무슨 셀럽도 아니고 일주일을 분단위로 살고 있습니다. 주변에 보니 증권이나 부동산 투자를 열심히 공부하던데 나는 그런 것에 소질이 없으니 심리 상담을 공부하는 것이 더 빠르고 결과도 좋겠다 싶어 시작했으나 이지경입니다. 여기서 얻는 보람이라면 남들에게 이토록 열심히 산다고 자랑조로 앓는 소리 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제삼자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호되게 데인 경험이 많으니 될 수 있으면 내 사는 이야기는 나누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내 성화에, 아버지 팔순이라고 해서 고국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래, 효도 별거 있나? 사는 이야기 좀 드리고 열심히 공부하느라 힘들다는 응석 좀 부리면 기뻐하시겠지, 이런 계산으로 당분간 전하지 못했던 시드니 소식을 차근차근 전하고는 기특하구나, 몸 상하지 않게 하거라 하는 대답을 응당 기대했습니다.


5일 일했으니 토, 일은 학교에서 쉬면 되겠구나! 공부보다 더 좋은 휴식이 있더냐?


이 말에서 받은 충격으로 일주일 넘게 안 좋은 꿈에 시달립니다. 그게 뭐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냐고들 하시겠지만 저 말이 뜻하는 진짜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기꺼이 번역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공부 못하는 놈아! 평생을 못했으니 이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하거라, 그러다 죽어도 된다.


칭찬은 고사하고 지친 몸이랑 마음에 아프게 매질을 당한 기분입니다.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럽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매가리가 탁 풀립니다. 잠시지만 아버지에게 평범한 사려를 기대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고 어리석습니다. 아니, 아버지 하고 말을 섞은 것 자체가 너무 후회됩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나 아내는 이런 상황이나 내 심경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제 가슴에는 피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한 가지 예를 든 것이지만, 날 잘 안다는 다른 가족이랑 친구들이 주는 이런 역린 어택은 정말 뼈아픕니다. 내가 무의식에 가진 어떤 고착된 상처, 억압된 욕망을 별생각 없이 혹은 농담한답시고 툭 친 사람은 갑자기 개정색하는 내 얼굴 표정을 마주해야 합니다.

왜! 또! 뭐가 문제인데?!


진심으로 화난 사람에게 그 원인이랑 자세한 심경을 설명해 보라는 것처럼 잔인하고 무식한 부탁이 또 있을까요? 이러니 저는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러다 겨우 이렇게 글 한편 쓰면서 화를 삭이는 것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저에게 치료입니다.


그럼 나는 다른 사람 역린을 잘 피해 다니던가? 아무래도 우리처럼 사람 상대하며 먹고사는 서비스 업종은 그런 훈련이 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 고객들이 지금 이 말을 듣는다면 세상 너같이 불친절한 인간이 할 이야기는 아닌데라고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두 착각이고 실망만 가득한 지옥입니다. 이런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환상이라는 마약입니다. 어제 일등 5천만 원짜리 공모전에 글을 보냈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공모전에서 수상한 적은 없지만 상상합니다. 여덟 명 남짓한 수상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고국행 비행기에 타는 환상만이 지금 날 위로합니다.


그리하여 날 무시했던 인간들, 내 역린을 마구 건드렸던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가 복수합니다. 훨훨 하늘을 나는 용이 되어 진정으로 통쾌해합니다.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https://youtu.be/NTKOyUWRO7o?si=ma4G7ua-ez9bqy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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