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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몽이 Nov 13. 2022

성적인 욕망 때문에 괴로울 때

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2

1.

교회 열심히 다녀도 성적인 욕망을 손쉽게 잠재우지 못합니다.


성적인 욕구가 너무 본능적이다 보니 자극적인 성인물이 넘쳐나는 인터넷을 탓하거나 무너진 윤리 의식 핑계를 대기 민망니다. 원초적 성본능에 충실했던 인류의 역사는 차고 넘칩니다. 인기 있었던 고대 종교는 언제나 풍요와 다산을 내세워 성적 욕구를 합법적으로 표출하도록 장려했습니다. 만물이 음과 양의 결합으로 재생산되고 영속된다는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성본능에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성경 속 사례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장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예배자의 모범이었던 다윗왕에게 어떤 성적인 일탈이 있었는지 상세히 보고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많은 자칭 타칭 영웅호걸들처럼 공식적인 다수의 처첩이 부족했는지 왕의 지위를 남용하여 한 유부녀와 강제적인 혼외 성관계를 맺습니다. 더욱이 이 유부녀는 부하 장수의 아내였는데 다윗은 자신의 성범죄가 탄로 날까 두려워 결국 이 부하 장수를 우연을 가장해 살해하게까지 이릅니다.


한순간의 성적 욕망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다윗왕 평생 쌓아온 기도와 예배와 경건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또 다른 끔찍한 범죄로 이어진 최악의 성경 사례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성적 욕망 때문에 비롯된 충격적인 범죄들을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쉽게 말해 신앙이 좋다고 해서 성적 욕망을 쉽게 제어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력하게 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2.

요즘도 교회 안에서 성적인 욕망이 꿈틀대고 있음을 심심치 않게 경험합니다.


최근 들어 교회마다 미디어 활용도가 높아지다 보니 초고속 인터넷, 와이파이는 기본이고 인터넷 방송을 위한 고사양 컴퓨터도 많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가장 거룩하고 은혜로운 예배 시간에 성경 말씀과 찬송가를 화면에 제공하고 찬양대와 설교자, 교인들의 모습을 인터넷으로 방송하기 위한 장비들입니다. 그런데 실제 몇몇 교회에서 실시간 예배 중에 음란물이 일시적으로 방송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피해 갈 수 없는 방송 사고인데, 방송실 관계자들 중에 방송 컴퓨터로 음란물을 보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교회 내 각기 가정이 있는 어느 장로와 권사가 공공연하게 애인 사이인 경우도 있습니다. 기혼 목회자들 중에도 교회 내외에 혼외 애인이 있어 교인들 눈에 띄거나 CCTV에 기록이 남아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젊은 남녀가 대거 함께하는 학생부나 청년부 수련회, 해외 선교여행에서 성적인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듭니다. 범죄에 해당되는 일들은 물론이고 쌍방 합의에 의한 후회스러운 실수도 은밀한 침묵 속에 묻히곤 합니다.


믿음 좋은 한 남성이 부흥 집회 중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 눈을 떴는데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다른 여성이 눈에 들어와 집회가 끝난 뒤 모텔에 가자고 제안했다는 얘기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지어낸 얘기가 아닌가 의심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70이 넘은 목사 입에서 "우리 중고등부 여학생들 육체가 아주 성숙하다!"는 말이 나왔을 때 모든 사람들이 모멸감을 느끼고 면전에 욕을 쏘아붙이고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이 목사는 급성 췌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정말 듣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면 성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 시험 거리인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3.

예수님께서 성적인 욕망과 관련하여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태복음 5:28-29)


기독교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마치 성적인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졸업한 것처럼, 교회 안에서는 어떤 성적인 부끄러움도 없고 늘 떳떳한 것처럼 정색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성적인 문제를 콕 짚어서 말씀하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적인 욕망이 예수님 기준에서 범죄의 기준으로, 지옥 갈 간음의 수준으로 판단되는 경우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 자체라고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금욕을 요구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이 음욕을 실행할 경우 그 손을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적인 욕망 자체는 성경에서 금욕의 대상으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적인 욕망 없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8)


그리고 성본능과 성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자녀 출산을 하나님의 축복이자 상으로 이해했습니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27:3-5)

그러니까 어떤 제약이나 진지함 없이 뻔뻔한 음욕이 문제이고 욕망 자체로 추구되는 간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성본능 자체를 금욕하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4.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성적 욕망입니다. 괴롭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훈련은 기독교,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무척 낯선 개념일 수 있습니다. 불교나 명상 프로그램 같은 곳에 좀 더 친숙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한국 개신교에서 추구하는 영성이 의외로 단순 무식하다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괴로움이 생기면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성적인 욕망 때문에 생겨난 괴로움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개신교회 기도회라는 곳에 가보면 한바탕 울고 불고 소리지르면서 기도하고 온 몸에 땀이 나도록 방방 뛰고 춤을 추거나 손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고 고래고래 찬송을 부르고 나서 시원해하고 뿌듯해하는(교회 용어로 "은혜 받았다") 기도 루틴이 많습니다. 좋게 말해 부정적인 에너지로 발전할 수 있는 욕망(성적인 욕망까지)을 그야말로 불태워 소진해 버리는 겁니다. 어떤 집회를 가보면 이것이 기독교 푸닥거리인지 기독교식 나이트클럽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곳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철저히 종교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에게 모든 초점을 맞추는지 모릅니다. 내가 얼마나 신나게 울었는지 내 마음이 얼마나 몽글몽글 했는지를 집요하게 따지거든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은 의외로 미미합니다,


그런데 만약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같은 교회 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있다면 이런 단순무식한 기도의 효과가 얼마나 갈까요? 기도가 늘 효과가 있었다면 다윗과 같은 모범적 신앙인이 왜 일반인들도 엄두내기 힘든 성범죄를 순간적으로 저질렀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아주 작은 해결의 실마리를 역시 다윗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

다윗이 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강압적인 성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어떻게 상황을 수습하는지를 유심히 봐야 합니다.


물론 다윗도 처음에는 상황을 부인하고 욕망을 억압하고 은폐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결과가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숨길수록 성적인 욕망이 불러온 화를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다윗의 괴로움해결는가 하면 다윗 진정으로 애정했던 선지자 나단에 의해 성적인 욕망이 불러온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①다윗이 성적인 욕망이 불러온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첫번째로 한 일은 자신의 성적 욕망과 그것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 나단과 사람들 앞에서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사무엘하 12:13)


중요한 것은 혼자서 정신승리 차원에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가장 신뢰하는 나단과 주변 사람들에게 민낯이 공개된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성적인 욕망은 욕망하는 상호 간에 적극적으로 합의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욕망하는 상호관계가 타인들에게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때 괴롭지 않고 편안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 발생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이 욕망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②그리고 단순 욕망으로 끝내지 않고 책임을 졌습니다.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사무엘하 12:18)


욕망의 산물인 아이가 몹시 아팠고 그 기간 동안 다윗은 자신의 성적 욕망이 불러낸 결과를 온몸으로 겪으며 만감이 교차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상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민의 결과는 아이의 죽음이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성적 욕망의 분출은 죽음이라는 결과로 다가왔고 다윗은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단순 욕망의 대상으로 출발했던 여인을 후처이긴 하지만 정식 아내로 맞이합니다. 한마디로 책임을 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결혼이라는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성적 욕망을 책임 있게 행사하여 아들 솔로몬을 출산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를 뛰어 넘어 고대 왕들 중에서 가장 지혜가 뛰어나고 세계적인 부와 명성을 누렸던 왕으로 알려졌습니다. 성적 욕망이 워낙 불같이 타오르지만 적절한 책임을 동반할 때 매우 긍정적인 결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하겠습니다.


제어되지 않는 성적 욕망이 올라올 때 잡념을 없애는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도 방법이겠고 정신과에서 성욕을 낮춰주는 약을 처방받을 수도 있겠고 욕망의 대상 또한 나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 똑같이 화장실 가고 코딱지를 파고 방귀 뀌는 존재라는 명상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억누르거나 없애고자 노력하며 모른 척하는 것은 언제든 다시 나타납니다. 실제 해결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욕망을 실현하되 가장 안전하고 책임지는 방법으로 다룰 때 '이미 성취된 것은 전처럼 욕망하지 않게 된다'는 원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성적 욕망을

안전한 사람들에게 용기내어 이야기하시고

그로 인한 부끄러움을 감당하시고

성적 욕망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는 나의 한계와 부족함을 받아들이시고

성적 욕망을 책임의 테두리 안에서 건강하게 실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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