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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몽이 Jan 04. 2023

꿈을 꿨다, 환상을 봤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8

1.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그중에서 주목받고 싶은 욕망,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은 마음이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을 자주 만들어 냅니다.


가장 단 시간 내에 주목받는 방법은 교회에서도 역시 돈을 많이 쓰면 됩니다. 큰 액수의 헌금을 한다든지, 고가의 교회 비품을 기증한다든지, 중요한 교회 모임에서 한 턱을 낸다든지, 교회 내 중요 인물에게 선물 공세를 해서 단숨에 인싸로 등극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담임목사 설교에 모범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방법은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이 넉넉한 부류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은 언제고 또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사람들은 모색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비로운 꿈을 꿨다고 간증을 하거나 특별한 환상을 봤다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입니다.


자주 꿈을 꾸고 그 꿈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장하려는 장로님이 계십니다.


하루는 늘 그렇듯 굉장히 영적인 꿈을 꿨다고 사람들 사이에서 의기양양하고도 큰 소리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제 또 내게 꿈을 꾸게 해 주셨는데 글쎄 양 떼가 가득한 동산 중앙에 큰 성경책을 내가 떡 하니 놓는 꿈을 꿨지 뭐야!"


꿈 얘기를 할 때마다 장로님의 모습은 마치 무대에 올라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와 같이 약간은 다른 인격의 모습으로 어깨와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손동작은 과장되어 하늘을 휘젓고, 눈빛은 감격에 차 허공을 응시하며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리고 다소 특징적인 요소는 사람들의 반응을 중간중간 몹시 간절하게 점검하고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 새로 젊은 목회자가 부임했는데 젊고 체구가 왜소한 것에 비해 상당히 안정감이 있는 유형의 목회자였습니다. 이 꿈꾸는 장로님은 기선제압 차원에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과 중요성을 초장에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서 신임 목회자 사택까지 직접 찾아와 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큰 성경책을 동산 중앙에 놓는 장면을 재연할 때는 마치 천둥이 치듯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초면이라는 상황을 의식해서였는지 젊은 목회자의 반응이 무덤덤했는지 꿈 이야기 끝에 '제가 아무래도 신학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시 같습니다'라는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단순히 꿈 이야기로 끝났다면 그다지 큰 문제가 없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의 장로님 개인 해석이 덧붙여져 마치 '어린 목회자가 나처럼 이 교회에서 오래된 장로를 설마 목사라고 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죠. 내가 이래 봬도 목사나 마찬가지인 영적인 인물이오!'와 같은 의도가 담긴 것처럼 들리고 말았습니다.


그 젊은 목회자는 꿈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바로 질문을 했습니다.


"장로님! 그 꿈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동산 중앙에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신학공부를 해야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에는 좀 비약이 아닐까요? 집사, 권사, 장로, 구역장, 지역장도 성경을 양 떼들 중앙에 놓는 역할이고, 신학공부했다고 해서 다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꿈 이야기 뒤에 해석 부분이요...장로님, 꿈의 해석도 기도해 보시고 해석에 대한 계시도 따로 받으셔야 하는데, 해석에 대한 기도는 안 하신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장로님 혼자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동안 꿈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사람들의 주목을 단숨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꿈 이야기를 마치면 주변에서 '장로님 혹시 제 꿈도 해석을 해주시겠어요?' 내지 '장로님이 하나님 계시를 잘 받으시니까 저를 위해서 좀 기도해 주실 있을까요?' 이런 식의 존경과 부러움의 반응이 나와야 마땅할 텐데, 정말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습니다. 꿈꾸는 장로님 스스로도 그동안 꿈꾼 이야기는 신나게 했어도, 꿈에 대한 해석도 따로 기도를 하고 해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해봤습니다. 꿈을 자주 꾸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꿈 해석은 더구나 아무나 할 수 없고 꿈꾸는 사람과 꿈 풀이하는 사람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꿈 풀이도 개인 소감을 말하는 정도여서는 안 되고 성령의 감동으로 풀이의 은사를 받아야 가능하다는 성경의 기록들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것입니다.


꿈에 관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요셉만 해도 어릴 적에는 꿈을 꾸던 요셉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지고 난 뒤에는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환상에 관해 유명한 다니엘의 경우도 환상에 대한 해석을 위해 따로 기도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성경은 전합니다.(다니엘 2장)


꿈꾸는 장로님은 그야말로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꿈꾸듯 영롱했던 눈동자는 혼란으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인물로서 목소리를 내는 필패의 전략이었던 꿈이, 굴러온 돌의 예기치 않은 질문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며 초라한 바닥을 바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2.

꿈과 환상하면 먼저 떠오르는 성경 인물들이 있습니다.


꿈쟁이라 불리던 요셉, 말해주지 않는 꿈까지 알아맞췄던 다니엘, 난해함 때문에 논란이 여전히 많은 계시록의 요한, 그리고 정말이지 환상의 장르와 형식이 이토록 다채로울 수 있을까 싶은 에스겔에 이르기까지, 또한 중요한 인생의 고비마다 꿈에 나타난 천사들의 음성을 따랐던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


꿈과 환상이 삶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꿈과 환상을 접했을 때 많이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꿈과 환상이 평상시 내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강화하는 내용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낯선 이야기이거나 심지어 내 뜻과 정반대 되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창세기 40:5-6)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6:5)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하니
(다니엘 2:3)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사도행전 11:7-9)


정확히 꿈과 환상과 관련된 구절들 일부만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당황하고 근심하고 번민했습니다. 자랑할 말이 생겨서 신나거나 내 뜻을 하나님께서 확인해 주셔서 의기양양해지는 반응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성경 인물들이 하나님 임재 가운데 깊이 들어가거나 하나님 말씀을 접했을 때 느끼는 반응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내가 살면서 굳어진 생각들을 정면으로 재구성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이었기 때문에 놀라고 무섭고 당황스럽고 슬프고 근심하고 도망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실 정도였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환상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내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두 번째 공통점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 주시는 꿈과 환상을 접하고 난 뒤에 반드시 새로운 도전과 변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요셉은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인생이 오랜 기간 예측불가의 내리막길을 걸었고, 이사야나 에스겔 같은 경우는 환상을 보고 난 뒤에 유명 인기인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나는 것을 넘어서서 허위사실 유포, 가짜뉴스 전파자로 감옥에 갇히거나 살해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꿈과 환상의 무게가 자신의 생명과 삶 전체를 내걸고 이행해야 할 만큼 묵직했고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운명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꿈과 환상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뜻을 발견하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 뜻을 강화하고 하나님 시스템을 더 진하게 경험하게 만드는 한 차원 다른 메시지였을 뿐 환상과 꿈의 출발점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꿈을 꾸는 사람의 의도나 평상시 생각으로 담아내기에는 너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나서 더 인기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고 인생이 꼬이고 불이익이 줄지어 기다린다면 함부로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기도 중에 환상을 봤는데...라고 쉽게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꿈이나 환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맞는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3.

한때 교회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일부 목사들의 차가 최고급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보면서 신학대학교 정원이 해마다 증원되어도 경쟁률이 높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교육부 인정 학위가 아닌 교단, 나아가 교회 인정 신학원도 우후죽순 설립되었는데 학생이 넘쳐났습니다. 그야말로 되는 사업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학원들이 폐원되고 정규 신학대학교의 정원을 줄여도 줄여도 미달 사태가 해마다 심각해집니다.


다들 겉으로만 가시밭길 고난의 길이라 말만 했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팩트보다 고진감래라는 속담에 더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앞에 고생하면 뒤에 인생 편해지겠지, 뭔 일인들 쉬운 일이 있겠나? 했던 거죠.


사회에서 실패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교회를 기웃거리다 여기도 여전히 관심을 끌만한 아이템을 찾느라 꿈과 환상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성경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꿈과 환상이 특기라고 생각하는 그대는 관종이거나 예전 기준으로 봤을 때 동네 연예인 같은 무속인 기질이 다분한 정도니까요. 재미있는 것은 내림굿을 받아도 무당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개업 무당도 폐업하기 일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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