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이해보다 뜨거운 대면 : 기꺼이 허우적거릴 용기

판타레이, 민태기 저

by 꿈꾸는 나비

세상에는 들자마자 손목 인대가 먼저 비명을 지르는 책들이 있다. 이번 독서모임 지정 도서였던 『판타 레이』가 딱 그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의지로 먼저 고른 책은 아니었다. 과학, 그것도 '유체역학'이라니. 평소의 나라면 서점에서 가장 발걸음을 재촉해 지나쳤을 이를테면 '지적 지뢰밭' 같은 코너에 놓여있을 법한 분야다.


"대체 왜 이걸 읽어야 하지?"라는 근본적인 회의감이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밀려왔다.


그런데 이 책, 묘한 반전 매력이 있다. 백과사전 같은 묵직한 종이 질감에 매거진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컬러 사진들. 어려운 책치고는 꽤나 친절하고 세련된 외모를 가졌다. 내용은 나를 사정없이 허우적거리게 만들면서도, 외관은 자꾸만 "나 정도면 읽어볼 만하지 않아?"라며 근사한 척 유혹을 보낸다. 이 기묘한 대비 덕분에 완전히 질리지는 않았다. 밀어내고 싶다가도, 그 고운 자태에 속아 한 번만 더 페이지를 넘겨보기로 했다.


진짜 시련은 본문에 진입하는 순간 찾아왔다. 작가는 마치 전성기 아웃사이더라도 빙의한 듯 지식의 속사포 랩을 쏟아냈다. 한 문단, 한 페이지에 담긴 정보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마 작가 본인이 아는 방대한 이야기보따리를 이 책 한 권에 다 풀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자, 이것도 알고 싶지? 이것도 신기하지?"라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설명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거대한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 책은 물리적으로도 내 독서력을 시험했다. 읽다 보니 내 눈앞에서 진정한 '홍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두꺼운 종이와 방대한 정보량을 견디지 못한 책등이 마감의 한계를 넘어서며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독서모임 멤버 중 한 명은 이 광경을 보며 "전공 서적을 쫙쫙 갈라서 들고 다니던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을 정도다. 책은 문자 그대로 갈라졌고, 그 균열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고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예전의 나라면 진작에 백기를 들었을 것이다. "역시 내 분야가 아니야"라며 조용히 책장에 유배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작가의 숨 가쁜 열정 속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딱딱한 공식이 아니라 뜨거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뉴턴과 데카르트 그리고 이름조차 생소한 수많은 천재들. 그들은 골방에 박힌 고독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커피하우스와 살롱에서 서로를 반박하고 설득하며 사유의 파고를 높였다. 과학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신의 계시가 아니라, 시대와 사람들 사이에서 굽이치며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그동안 나는 과학을 '정답을 아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즉시 퇴장해야 하는 무대로 여겼다. 하지만 이 책은 자꾸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모르는 것과 어떻게 대면하느냐”는 질문.


발제문을 준비하며 나는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해두었다. 예전 같으면 무식함을 증명하는 치부 같아 부끄러웠을 표시들이 이상하게도 이번엔 당당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작가님의 그 거침없는 랩을 끝까지 경청하고 쩍쩍 갈라지는 책장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내 태도가 더 크게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를 구조와 맥락을 궁금해하는 독자라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동시에 관심 없는 분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거우면 도망치는 겁쟁이이기도 했다. 이번 독서는 그 비겁한 습관을 깨뜨리는 과정이었다. 여전히 누군가 유체의 흐름을 설명하라고 하면 내 눈동자는 유체처럼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과학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분명히 달라졌다. 과학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질문과 논쟁이 축적된 결과라는 것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단어를 완벽히 소화하는 독서만이 정답은 아니다. 중간에 좀 허우적거리더라도, 작가의 이야기보따리에 치여 숨이 차더라도, 기어이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는 태도. 나는 여전히 과학을 잘 모르지만, 『판타 레이』 앞에서 분명히 달라졌다.


이해하지 못해도 덮지 않는 쪽으로, 관심 없던 미지의 영역을 한 번쯤은 펼쳐보는 쪽으로.


비록 책은 두 조각으로 갈라졌을지언정 내 독서의 지평은 그만큼 더 넓어졌다. 그 '조금'의 변화가 내 머릿속에 생각보다 오래, 그리고 깊은 파동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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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문장사이 독서모임 책으로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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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끄적임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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