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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폴 Dec 27. 2020

닭갈비

쫄깃쫄깃한 추억을 곱씹다.

  대학시절 닭갈비는 최고의 호사 중 하나였다. 친구들끼리 없는 용돈을 조금씩 모아 닭갈비 집으로 달려가 등받이 없는 빨간 동그란 받침의 철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들썩거렸다. 동그랗고 커다란 철판에 수북이 올려진 닭고기와 양배추가 자글자글 익어가는 것을 보며 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몇 번 뒤적거리다가 아쉬운 데로 밑반찬으로 나온 깍두기 하나 집어 먹고는 소주잔을 두어 번 부딪히다 보면 어느새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빨갛고 맛있게 익어갔다. 쫄깃쫄깃한 고기와 떡을 한 점 집어 후후 불고는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그렇게 맛나는지 몰랐다.



  강력반 시절 가끔 춘천에 출장 갈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닭갈비 집을 찾았다. 수사 접견이나 탐문을 마치고 나서 늦은 점심이나 늦은 저녁을 하기 위해 닭갈비 집에 들어가 커다란 철판 한 상을 받으면 갑자기 배가 고파지고 군침이 돌았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그렇게 또 힘을 내서 다음 일정을 시작하고는 했다.


  몇 년 전 집 근처에 닭갈비 집이 생겼다. 두 신혼부부가 호프집 하던 가게를 인수해서 닭갈비 집을 개업했는데 맛도 일품이었지만 부부의 친절도 참 일품이었다. 서로에게도 다정하고 사근사근하게 구는 것을 보면 덩달아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지고는 했다. 내 아내와 아들 녀석도 닭갈비를 좋아해서 한 달에 두세 번은 찾았던 것 같다. 이전 가게들이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일 년을 채 못 버티고 망해서 나간 곳이라 장사가 잘 되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제법 손님이 많아 다행이다 싶었다. 부부가 함께 성실하게 장사를 하는 모습도 참 예뻐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가게가 문을 닫았고 얼마 뒤에 호프집이 생겼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이 건물주가 장사가 잘 되는 것을 보고 가겟세를 터무니없이 올려 감당할 수 없었던 부부가 결국 가게를 포기했다고 했다. 단골가게가 없어져 맛있는 닭갈비를 쉽게 먹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쉽기도 하고 남 잘되는 것이 배 아파 재를 뿌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화도 났다.


  그리고는 몇 년 후에 다른 쪽에 닭갈비 집이 새로 생겼다. 동네에 다시 닭갈비 집이 생겨 반가운 마음에 몇 번 가다 보니 양도 푸짐하고 맛도 있어서 자주 가게 되었다. 가족 외식의 단골 메뉴가 되었고 동료들과도 자주 가서 닭갈비를 즐겼다. 아들도 이 집 닭갈비를 참 좋아했는데 한 번은 용돈을 모아서 혼자서 다녀온 적이 있었다. 혼자서 먹기에는 많은 돈을 쓰고 와서 어찌 된 일인가 물으니 1인분은 안 팔고 2인부터 판다고 해서 2인분을 시켜서 먹고 왔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린 학생 혼자 가니 상술로만 대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간에 살갑게 굴었던 것들이 가식적으로만 느껴져 배신감 같은 것이 들었다. 1인분을 팔던지 가게 운영상 그럴 수 없다면 팔지 말아야지 학생 혼자 와서 1인분을 안 판다고 하니까 먹고 싶은 마음에 다 먹지도 못할 2인분을 시킨 것을 그대로 주문을 받아 음식을 내왔다는 것이 그리 잘한 일이라고는 못하겠다. '손님이야 먹든지 말든지 나는 팔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내가 억지로 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네가 분명히 2인분 주문한 거니까 내 책임은 아니야'하는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그 이후로 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한 동안 닭갈비를 먹지 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올여름 춘천 소양강에 가족 나들이를 다녀왔는데 그곳에 있는 닭갈비 식당에서 막국수와 닭갈비를 오랜만에 먹었다. 시원한 동치미가 입맛을 개운하게 해 주고 매운맛을 잡아주니 또 다른 별미였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가 함께 가게를 꾸리고 계셨는데 춘천 닭갈비가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이 곳에 터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셨다고 했다. 한 때는 유명인들이 많이 찾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예전만큼 인기가 없다고 하셨다. 식당 어머님의 손맛 때문인지 곁들여 나오는 김치도 감칠맛이 있고 식당 아버님이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철판에서 치익치익 볶아주시는 볶음밥도 참 맛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당직을 마치고 아침에 퇴근해서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니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난 한 상을 차려 준다. 가만히 보니 빨갛게 먹음직스러운 닭갈비다. 목사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신 거였는데 내가 자는 동안 아내가 요리를 해서 아들과 우선 먹고 내가 일어나니 또 한 상 내온 것이다. '이야 맛있겠네' 하며 젓가락으로 닭갈비를 들고 한 입 우물우물하니 쫄깃쫄깃 맵깔스러운 맛과 향이 입안 가득히 퍼진다. 말캉한 떡과 달달한 고구마를 곁들여 다시마로 쌈을 싸서 먹다 보니 그 많던 것을 어느새 다 먹어 버렸다.


  목사님이 선물해 주시고 아내님이 요리해 주시고 그전에 농부님이 닭을 키우고 또 누군가는 닭을 잡아 가공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재료를 생산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팔아 공급해 주고 내가 맛있는 닭갈비를 먹을 수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선의, 그리고 마음이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허락하신 것. 다른 것이 아닌 그것이 복이라는 것. 내가 먹는 음식이 은혜라는 것. 나의 일상이 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은퇴하면 닭갈비 집을 차려 볼까. 빗나간 청춘들 좀 데려다 실컷 좀 먹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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