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상으로

by 드림포터

이슬은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의 끝에는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깨달음은 세상 끝까지 오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맛은 순수의 결정체 빙하가 흘러내린 물이 아니라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이라는 것을.

어제의 이슬이 오늘의 이슬이고 내일의 이슬이란 것 도 알게 되었다.

어제의 이슬이 오늘의 강물이고 바닷물이다. 그리고 내일의 얼음이고 구름이다.

이슬 한 방울이 언젠가 고래가 되고 인간이 된다.


빙하는 지구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다. 혈관의 이완과 수축으로 체온을 조절하듯 빙하는 태양광을 반사시켜 지구의 온난화를 방지하고 차가운 얼음은 적도의 뜨거운 열기를 식힌다. 인간의 이기적 문명과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자연은 고통받는다. 인간은 파괴를 바탕으로 한 생산을 추구한다. 그들의 자식을 사랑하면서 그 자식들의 미래는 존중하지 않는다.


지구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유일한 생명체는 인간이다. 지구를 괴롭히는 암덩어리 이자 가장 어리석은 동물이다.

빙하가 힘겹게 식은땀을 흘린다. 땀방울이 피처럼 흘러내려 바다를 적신다.

이따금 오한이 들린 듯 온몸을 부르르 떤다. 그때마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표면이 갈라진다.


밤하늘은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그 위엄 있는 보름달 아래, 바다는 그날 밤, 평소보다 더 크게 숨을 쉬었다. 지정 시간이 다가오자, 물결은 한껏 몰아치다가 새벽녘에는 갑자기 잔잔해졌다. 움직임이 멈춘 듯, 죽음에 가까운 고요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벽하늘을 가르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데 모인 것 같은 그 소리와 함께, 거대한 빙산 한 덩어리가 주변을 압도하는 위용으로 빙하에서 분리되어 바다로 떨어졌다


다시 세상으로.


빙산은 다시 세상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바다 깊은 곳에서 조류의 흐름을 따라, 때로는 인간의 배와 마주치기도 하고, 때로는 철새가 쉬어 가기도 한다. 물의 흐름이 조금씩 빨라지고, 한때 두꺼웠던 얼음은 점차 얇아진다. 칼바람이 지나간 뒤, 익숙한 바람이 그 자리를 채운다. 아주 오래전, 갓 태어난 이슬이 처음 만났던 그 바람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는다.


먼지 한 톨 없는 맑은 하늘, 햇볕이 유난히 뜨겁다. 주위의 돌덩이 같이 차가운 얼음은 녹아내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예전의 물방울이 되었다. 따가운 햇살은 한여름 고문이라도 하듯 집요하게 내리쬐고 햇살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슬은 서서히 달아오른다. 가릴 것도 숨을 곳 도 없다. 얼음벽에 막혀 바다로 뛰어내릴 수 도 없다.


잔잔한 떨림이 조금씩 빨라진다.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듯 찰나의 순간 요란한 떨림은 사라지고 중력이 사라진 듯 깃털처럼 한없이 가볍게 이슬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이슬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위를 비행한다. 바다와 하늘이 하나가 되어 빙글빙글 돈다. 어디로 가는 건가. 멀리 수평선이 둥글게 보이고 거대한 빙산이 조약돌처럼 작아진다.


형체가 사라졌다.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어느 날 아침엔 안개가 되고 오후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바람이 되어 기류를 타고 세상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하얀 뭉게구름이 되어 바람에 실려 바다 위를 지나간다. 바다 한가운데 고래가 무리 지어 춤을 춘다. 고래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바다의 경고는 인간 세상에 변화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시작한 이후로 음식물 찌꺼기는 더 이상 하천으로 흘러들지 않는다. 페트병은 버려지지 않고 재활용된다. 전기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매연이 줄어들고, 상선에서 흘러나와 바다를 오염시키던 기름 찌꺼기는 천연가스로 대체되면서 하늘이 맑아졌다.


늦여름의 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 한 줄기 부드러운 미풍에 실려 나는 듯이 떠다니던 중, 눈 아래 펼쳐진 풍경이 어딘가 낯익게 느껴졌다. 그리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잊고 있었던, 하지만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엄마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그 따뜻한 품으로 다가가 안긴다.


이른 새벽 작은 풀잎 위에 이슬 하나가 맺혀 있다.

이전 09화세상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