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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04. 2021

골목

사진 에세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봄에 찾아오는 무력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가만있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중 한 곳이 골목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골목이 도시개발에 하에 차곡차곡 없어져서 재개발이 되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아직 한두 군데의 골목은 남아있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을 가장 느낄 수 있는 곳은 골목이다. 골목의 봄날에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곳, 시멘트 사이나 보도블록 이음새의 시커멓고 더러운 곳에서 노랗고 예쁜 꽃이 올라오고 있다. 이렇게나 어린 꽃이 꼭 이렇게도 딱딱하고 차가운 땅을 뚫고 올라오더니, 4월은 그야말로 잔인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골목으로 접어들기 전에 평소보다 많이 걷는다. 조금 빠르게 걸으면 등에서 땀이 난다. 면 티셔츠에 두껍지 않은 저지를 입고 있지만 계절은 그렇게 존재를 확고하게 확인시킨다. 아주 작은 로컬 카페를 지나는데 밖으로 ‘스텐 바이 유어 맨’이 나오고 있었다. 벚꽃은 만개와 동시에 무화되어간다. 불꽃과 같은 벚꽃의 미학이다. 찰나로 왔다가 가버리는 냉정한 그 사람처럼 머물러주지 않는다. 골목에 들어오면 바야흐로 봄이라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동시에 애매한 계절이라는 것도 안다. 무력함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애매한 기운을 잔뜩 지닌 봄이 나의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달리는 거리를 앞지른다. 매년 맞이하는 나의 봄은 늘 그렇다.


애매한 계절. 기이한 분위기의 여자가 매력을 한껏 뿜으며 다가오는데 그 매력을 딱 정의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다. 그런 계절이고 그런 봄이다. 봄이면 조깅을 하다가 한 지점에 가만히 서서 그런 기운을 잠시 느끼곤 한다. 다른 계절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마력 같은 결락감.


겨울의 차가운 강이 풀리면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물가로 몰려오는 덕분에 물속으로 고꾸라지며 분주해지는 오리들의 모습에도 봄이 내려앉았다. 지난 겨우내 바이러스와 먼지를 이겨낸 생명체들이 그림자를 밀어내고 땅 밖으로 마구마구 올라온다. 봄이 간직하는 냄새와 향이 뒤섞여 몸 둘 바를 모르게 한다. 유난히 작고 껍질이 두꺼운 귤을 하나 까먹었다. 단 맛보다 신 맛이 더 났다. 그 맛이 기도를 축축하게 적시며 내려갈 때 꼭 위로 같아서 조금 놀랐다. 그것 때문에 울컥함이 올라와서 또 한 번 놀랐다. 바람이 불어와 고개를 드니 현실과 직면한다. 어쩐지 미시적인 봄은 왔지만 거시적인 봄은 너무 멀리 있다. 저 앞에 골목이 보인다. 


봄햇살을 받은 대문

봄의 가운데 쉬는 날이 되면 봄날의 햇살을 잔뜩 받으며 어촌의 골목길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다. 그게 몇 해 전까지의 봄이 오면 나만의 출사 방법이었다. 어촌이라고 하지만 광역시로 오래 전의 골목의 모습은 이제 대부분 개발되어서 사라졌고 거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래도 차를 버리고 발품을 팔아 입을 다물고 걸어 다니면, 제법 골목길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사진으로 담으면 기분이 좋다.


봄은 골목으로 가장 먼저 온다. 골목의 담벼락과 갈라진 틈으로 어김없이 봄의 정령은 꽃을 피워 올린다. 고등학생 사진부 시절 필름을 버려가며 봄이 되면 아직 겨울의 때를 벗지 못한 골목의 축축한 틈에서 잡초가 올라오는 모습을 담곤 했다. 그땐 감성이라기보다 사진부 선배들에게 맞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봄을 담으려 했던 기억이 있다. 학생이며 선배라는 건 당시에 아주 이상한 존재로 선배에게 맞으면 선생님에게 맞는 것의 몇 배는 더 고통을 느꼈다. 다리에 멍이 파랗게 드는 것이 아니라 빨주노초파남보로 든다.


어촌에는 대문이 없는 집들이 있었다
어떤 집의 화장실 창문

겨울 외투를 휙 벗어던진 골목을 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스며있다.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냉이를 넣은 된장국을 끓이고 마당의 화덕에서는 고등어를 굽는 냄새가 골목 구석구석 퍼진다. 이런 모습이 내 머릿속을 이루고 있는 어린 시절의 골목의 풍경이다. 기억보다는 추억이 되어 봄이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골목에 서 있으면 겨울 동안 굳어있던 몸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작은 음식에도 만족을 느낀다. 몇 해 동안 봄의 골목을 가득 담은 사진이 꽤 있는데 이제 사진에서만 존재하는 골목들이 많아졌다. 사진을 보면 봄은 골목으로 가장 먼저 와 있었다.

여름이면 창문을 열고 라디오 별밤을 들었던

뱀에 물리면 좋지 않아.

 

전 뱀에 물리지 않았어요.

 

골목에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나이가 많은 홈리스가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옆에는 노인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개가 더위에 지쳐 혀를 내밀고 할딱 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지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고 개는 양쪽 눈의 색이 달랐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살아.


라디오가 할 시간이면 여기까지 쓴 글을 덮고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는 신청곡을 선별하여 틀어 주느라 바쁘다. 골목에 어둠이 내리면 어둠에 몸을 숨기고 라디오 디제이의 언어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골목의 단칸방에서 뜨거운 마음과 차가운 머리로 설레는 시간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시간도 있었다. 포근하기만 한 골목의 풍경. 나는 자신을 어딘가에 놓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


집집의 수호신 같았던 대문의 사자 손잡이

그곳은 시간에게 버림받은 곳이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한 채로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 같았다.


요즘 나온다는 폴더블 폰처럼 이 대문도 몇 십만 번은 열렸다 닫혔겠지

그 사이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난 널 만난 거야.

그때부터 내 사랑은 시작된 거야.

널 보면 날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어.

멋있는 척해 봐야 바뀌는 건 없어.

꼴사납다든지 끈질기다든지

이젠 상관없어.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어.


라며 사랑이 시작되어서 만나고 결혼을 하고 다른 곳으로 보금자리를 만드는 이야기처럼.


이제는 외면만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밝았다.

빛은 있었다.


밤인데 아이폰4로 찍어서 
뭐든 팔았던 동네 슈퍼. 뭐든 잘 없었던 동네 슈퍼

조깅을 하다 보면 늘 달리는 곳에서 벗어나서 여기가 어디지? 하는 곳까지 와버리는 경우가 있다. 오래된 마을로 들어가 오래된 골목을 지나 오래된 집들 사이로 휙 들어가면 오래된 것들이 아직 여봐란듯이 있는 것을 본다.


세월이라든가 시간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오래 겪으면서 치이고 깎이면서도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 모습을 쳐다보면 편의적인 세상에서 편의적인 기억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편의적인 인간이 대체로 되었다. 


오래된 것들은, 새로운 것들 사이에 끼어있는 오래된 것들은 무엇인가 해보려는 의지를 가지다가도 그런 행동이나 논리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아 오래된 것들은 오래된 것들이 가지는 정당한 밸런스를 잃어버린 채 서서 어둠 속에 숨어간다.


내 내부의 어떤 밸런스는 언제부터 무너졌는지, 또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밸런스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생각에 깊게 빠져들어 갈수록 세상은 보란 듯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고 오래된 사람들은 마트에서, 공영주차장에서 퇴출시킨다.


새로운 세상은 일정한 통일을 요구한다. 통일된 디자인과 통일된 감각과 통일된 컬러와 통일된 인간관계를 요구한다. 오래된 것들이 들어설 때처럼 개성이 넘치는 모습은 새로운 통일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아직 남아서 버티고 있는 오래된 것들에게서 향수 그 이외의 어떤 의미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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