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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30. 2022

바람이 불어오면 4

소설


4.


 승섭이는 평소에 내가 혼자 앉아 있으면 다가와 쪽지를 몰래 건네주고 갔다. 쪽지를 펼쳐보면 나에게 이런 음악이 있는데 분수대로 나오라느니, 오늘 점심을 같지 먹지 않겠냐느니, 미국에서 온 건축 잡지가 있는데 같이 보자, 같은 메모가 있었다.


 읽고 나면 갈기갈기 찢어서 잘 버려주기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반은 다른 곳의 쓰레기통에 버려,라고도 쓰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귀찮아서 강의실 쓰레기통에 다 버렸다가 밥을 먹으면서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열 가지나, 밥을 먹는 내내 들어야 했다. 승섭이가 하루는 미국에서 건너온 또 다른 잡지라며 금발의 포르노 배우들이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생식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만 있는 잡지책을 들고 왔다. 게 중에는 거기에 링이 달려 있기도 했다. 승섭이의 눈 주위가 또 붉게 물들었다. 내 자취방은 승섭이가 머물렀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 학교에 나타난 승섭이는 양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선배의 방에서 선배와 그녀와 나는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먹다 보면 선배는 걸걸한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나와 그녀는 웃으며 이야기를 듣는 쪽에 속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소리가 나지 않게 웃었던 반면에 그녀는 진취적으로 웃었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있어요? 러시아 고전?” 그녀는 내가 책을 읽는다는 것을 선배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웃을 때는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었다. 눈의 끝이 밑으로 쳐졌고 눈가의 주름이 미술작품처럼 번졌다. 그녀의 웃음은 환했고 웃을 때 보이는 치아는 기분이 좋았다. 저런 입술과 키스를 한다면 영혼이 다 빨려나가도 좋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내 앞에서 잘 웃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이렇게 잘 웃어 준다면 말하는 사람은 입에 모터를 달고서 라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선배라는 사람은 듣는 이가 잘 웃지 않아도 이야기를 쏟아냈다. 잘 웃지 않는 이가 바로 나였다. 선배의 이야기는 늘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모이게 하는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해변에 도착을 했을 때는 말이지 태풍이 이미 파도를 2미터 높이만큼 만든 후였지. 라디오나 뉴스를 확인하지 않고 가버린 결과였어. 태풍이라는 난관을 맞이하게 된 거야. 하지만 태풍을 무시하고 해변에 텐트를 쳤어. 안도 다다오 수준으로 텐트를 쳤지. 태풍이 몰려오는 해변과 잘 어울리게 말이야. 자연주의적으로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을 정도로 해변 바닥에 박아 버렸지. 해풍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댔지. 태풍이 바다를 만나 해풍을 만들었는데 그 움직이는 바람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지. 바람이 저기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단 말이야. 굉장했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굉장했어. 해변은 말이야 어떤 깎아지른 절벽 같은 곳을 타고 내려가서 찾아낸 보물 같은 해변이었어. 해변은 오래전 영화 구니스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해변이었어. 자갈로 되어 있는, 태풍이 막 몰려오기 직전 날이 흐르고 물속에 들어가기도 너무 차가웠어. 여름인데 이렇게 물이 차가울 수 있다는 게 꽤나 신기했지. 여름에 차가운 건 어쩐지 냉장고 속이나 가능한 일이잖아. 그런데 그 오지 같았던 해변에도 텐트를 들고 온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어. 그중에는 가족이 두 팀이나 되었지. 해변에는 물질해서 해산물과 음료와 술을 큰 대야에 담아서 파는 간이매점 같은 곳도 있었어. 정말 분위기가 있는 장소라고 우리는 생각했지. 태풍만 아니었다면 붉은 석양을 보며 덱체어에 앉아 소주를 마음껏 퍼마셨을 거야.

 어떻든 텐트를 치고 안에서 축배를 들었어. 네 명이 해변으로 갔는데 한 명은 이미 소주에 취해 텐트  하나에서 뻗어버렸지. 상체는 텐트 안으로, 하체는 텐트 밖으로 내놓은 채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고 간이매점은 엄청나게 불어대는 해풍에 철수를 하고 남은 소주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어.”


 선배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선배의 자취방에 무전취식을 하러 온 아이들은 선배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야기에 집중을 했다. 마치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들 같았다.


 “밤의 시간으로 갈수록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파도가 사람의 키를 넘었어. 그 해변에서 야영을 하던 텐트가 총 여섯 대였는데 세 대는 이미 철수했고 두 대가 동물 우리처럼 아직 남아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바람이 너무 거셌기 때문에 그 텐트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 우리도 철수를 하고 싶었는데 모두 술이 너무 취한 거야. 게다가 이미 잠이 들어 버린 녀석을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 거야. 하체가 몽땅 비에 젖어 버리는데도 못 일어났더란 말이지. 바로 그때 우리 앞으로 텐트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거야. 우리는 달려가서 그 텐트를 주인이 있는 곳에 가서 어떤 태풍이 와도 날아가지 않도록 자갈 해변에 박아버렸지. 너무 깊게 박은 나머지 텐트의 키가 어린아이 키밖에 오지 않게 되었어. 콰쾅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때였어. 비바람이 치는 와중에 천둥이 울리더니 파도가 더 멀리서 이만큼 크게..”


 선배는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이야기를 했다. 선배의 이야기는 주위에 모여든 여자들, 남자 후배들이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들이 그 해변에 있었던 것처럼 빠져들었다. 선배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소리를 크게 내서 웃을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웠고 아름다웠다. 웃음은 이렇게 웃는 거야,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웃음은 시간이 갈수록 바삭바삭한 햇살 같았다.


 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의상과 학생들과 건축과 학생들이 선배의 방으로 각자 반찬과 밥을 들고 모여들었고 그들만의 만찬을 즐기며 식사를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가졌다. 마치 일종의 코뮌 같았다.


 나는 늘 잠시 앉아 있다가 밥을 다 먹고 나면 슬며시 빠져나와 나의 자취방으로 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멍하게 있었다. 어쩐지 먹은 것이 빨리 소화가 되지도 않았다. 책을 들었지만 그녀의 웃음이 책의 활자 대신 눈앞에 나타나기만 했다.


 나의 자취방은 그 일대에서 가장 방값이 저렴했고 자취방의 벽지는 세계에서 가장 보기 힘든 문형을 하고 있었다. 자취방을 사용하던 이전 자취생들이 담배를 많이 피워서 천장이나 벽지가 누렇게, 얼굴에 피어난 버짐처럼 꽃을 피운 곳이 많았다. 주인집에서 벽지를 새로 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주인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렇게 색이 바래질 정도면 담배를 얼마나 피웠을까. 그 사람의 폐는 괜찮은 걸까. 아마도 밥 대신 담배를 피웠고, 담배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버짐이 핀 천장과 벽지가 나쁘지 않았다.


 승섭이는 내 자취방에 누워 천장을 보며 말했다. “담배는 그래서 모두에게 해로운 거야. 담배는 저렇게 낙인을 남기니까 말이야. 꼭 마음에 상흔을 새기듯 형태가 없는데 형태를 남긴단 말이야. 냄새도 남기고 말이지.”


 “나의 공기 중에는 온갖 것들의 냄새가 도사리고 있어. 온기와 꿈과 예감과 하찮은 가벼움들 말이야.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들. 나를 둘러싼 것들은 그런 것들이야. 감촉되어 지거나 그럴 거라고 생각되어 지거나. 그런 것들. 이내 사라지는 것들이지. 어쩌면 우리는 그 속에서 가볍게 떠다니는 부유물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라고 나는 술이 취해서 말했다. 하지만 승섭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승섭이는 죽은 것처럼 잠을 잤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때가 있었다. 이렇게 고요하게 사람이 잠을 잔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한창 승섭이의 자는 모습을 보는데 승섭이의 가슴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이런 씨발”라는 말은 내가 승섭이는 있는 힘껏 흔들어 깨웠더니 승섭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승섭이는 평소에 전혀 욕을 하지 않았다. 승섭이는 가끔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엄지손가락이 없다면 뭐가 제일 불편할 것 같아?”


 가우디의 책을 보면서 승섭이가 말했다.


 “글쎄, 설계도면을 그리지 못하는 것?”


 “아니야, 똥을 못 닦는 거지. 그리고 팬티를 입을 때 불편할 거야. 똥을 닦아야 하는데, 정말 똥을 닦아야 하는데 엄지가 없으면 네 손가락으로는 불편하지. 어떻게든 되겠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게 해결이 되면 팬티를 올리는 문제야. 역시 어떻게든 되겠지만 무척 불편할 거야. 그렇게 해서 조금씩 불편해지고, 점점 일상에서 고립되는 거야. 그렇지 않아?”


 그리고 승섭이와 나는 자취방에서 바지를 내리고 엄지손가락 없이 팬티를 벗어서 입는 연습을 했다. 숨이 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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