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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01. 2022

바람이 불어오면 5

소설


5.


 승섭이가 학교에 나타났을 때 양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내 옷을 잘 빨아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덕분에 잘 입었어”라는 말을 했다. 승섭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승섭이는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별거 아니라고 했다. 그 녀석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엄지손가락이라고 했다. 승섭이는 어릴 때 엄마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아주 좋아해서 아주 싫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존재, 부유물 같은 존재들이야. 맞지?”라며 승섭이는 나에게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한 번 보이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승섭이의 등이 이전보다 많이 쪼그라들었다. 그 후로 승섭이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승섭이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승섭이가 늘 앉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앉아 보다가 나는 다시 나의 생각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그저 오늘은 어제의 이어짐이다. 반복될 뿐이다. 무한 굴레 속에서 우리는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이도 곧 사라지게 된다.


 생각 속으로 들어오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선배의 그녀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웃는 얼굴과 그녀에게서 나는 비누냄새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처럼 투명한 피부와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 그리고 번지는 비누 향. 웃음은 뭐랄까 평소에 내가 먹는 학교 식당의 국수보다 더 맛있는 국수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체크무늬의 옷을 종종 입었는데 생각 속에 온통 체크무늬의 그림이 마그리트 그림처럼 부유물이 되어 동동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라질 때면 늘 그녀의 웃는 얼굴이 동그랗게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웃음은 거기에 쳬셔처럼 남았다. 그녀는 체크무늬의 셔츠를 입지 않고 허리에 묶고 다니기도 했다. 물 빠진 군화를 신고 다니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패션에 대해서 과감 없었다.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리고 걸어가는 모습도, 반바지를 입고 드러나는 가느다란 발목도 떠올랐다. 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생각의 여러 부분을 차지했다. 높지 않은 톤에 결의에 찬 나긋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조근조근 조리 있게 말을 하면 압도감이 더 들었다. 큰 소리로 말하는 선배보다 말이다. 어떻든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술에 약을 타서 마시는 것 같았다. 선배에게 끌려 밥을 먹는 것은 못마땅했지만 거기에 가면 늘 그녀가 있었다. 선배가 마냥 부러웠다. 선배는 나와 맞지 않는 구석이 많은 사람임에도 선배는 나를 위해 주었다. 그게 좀 부담스러웠지만 선배에게 끌려가서 밥을 먹는 것은 그녀를 보기 위함이라는 것을 못된 놈처럼 나는 나에게 부인하지 않았다.


 승섭이가 빠져 우리 조의 대수롭지 않은 모임이 있어서 술을 마시고 자취방으로 와서 책을 들었다. 눈은 글을 쫓으려고 했지만 온통 그녀 생각이 시선을 압도했다. 책을 던졌다. 캔 맥주를 하나 땄다. 누른 얼룩의 꽃이 핀 천장이 보였다. 무늬는 끈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서서히 움직여 천장의 배경을 바다 삼아 떠돌아다녔다. 무늬는 이리저리 움직여 구름을 만들기도 했고 에셔의 그림처럼 모호한 형상을 만들기도 했다. 결국에 무늬는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축과는 내가 앞으로 가려고 하는 방향의 학업이 아니었다. 딱히 앞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이나 의지가 생겨나지 않았다. 건축과에 어울리는 사람은 승섭이었지만 결국 내가 남았다. 우리 조는 마치 소금이 빠져버린 바다 같았다.


 일주일에 5일 동안 꽉 찬 수업 중에 내가 관심이 있는 과목은 수요일 한 시간짜리 건축사 수업뿐이었다. 건축사는 파고들면 들수록 재미있었지만 돈을 버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수업은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건축사에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문이 닫힐 때까지 읽다가 나오기도 했다. 한 번은 문을 닫을 시간인데도 몰래 숨어 있다가 사서에게 들켰다. 사서에게 붙잡혔을 때 일 년 동안 밤을 새워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사서는 피식 웃으며 나를 내보내 줬다. 사서는 자신이 일하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와서 책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사서는 미저리의 캐시 베이츠를 닮았다. 사서를 볼 때마다 미저리에서 무섭게 변하는 케시 베이츠가 떠올라서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사서는 캐시 베이츠의 목소리 톤으로 학교 도서관의 책은 순전히 학생들을 위한 것이니 언제든지 빌려가도 좋지만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는 일은 안 된다고 했다. 차렷 자세로 넷, 하고 나왔다.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지는 않았다.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오롯이 책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집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또 소설은 잘 읽혔다. 도서관에서는 소설책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승섭이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자취방에서 소설을 읽다가 지치면 안토니오 가우디의 책이나 안도 다다오가 건축해 놓은 건축물에 관한 전집을 펼쳐 보곤 했다. 모두 선배가 가져다 놓은 책이었다. 빌려줬다고는 하나 찾아가지 않았다. 다 읽은 책들을 들고 가면 자취방에 놓을 때가 없다며 다시 들고 가라며 나를 돌려보냈다. 나의 자취방에는 여백이 선배의 자취방에 비해서 바다 같았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앞으로는 인간이 건축물로 탄생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승섭이의 말이 생각났다. 미래에도 많은 건축가가 나올 것이다. 이제 앞으로의 건축물은 기능이나 설비가 주가 되는 방향으로 건축될 것이다. 더불어 디자인은 간소하게 되거나, 간소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후퇴하거나. 디자인은 인간사 모든 것을 관장할 것이다. 앞으로는 디자인이 인간 생활 전반에 깊숙이 파고들어 점령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인간 역시 디자인이 제대로 된 사람이 소수에 속해 다수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디자인에서 소외된 인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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