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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03. 2022

바람이 불어오면 7

소설

7.


 [오래전 버스가 보였다.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버스는 물기 없는 들판이나 사막 같은 곳을 지나치고 있었고 도로는 포장이 덜 되어 있어서 불편하기만 했다.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의 얼굴은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지쳐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있었고 책을 보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책에 시선만 가 있을 뿐, 책의 내용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어떤 안도감을 찾기 위해서, 버스에서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수밖에 없어서 마지못해 책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버스가 심하게 흔들거려 머리가 어지러운지 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버스에 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대부분 검게 그을려 있거나 찢어져있거나 헤져 있었다. 버스의 그들은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지만 표정에는 미미한 희망이 엿보였다. 하지만 절망의 그늘에서 희망이라는 것은 초라하기만 했다. 어딘가에서 어렵게 탈출해서 삶이 보이는 곳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먼지를 가득 내며 흔들거리는 버스는 정처 없이 앞으로 갔다. 버스 안에는 제니퍼 원스의 ‘페이머스 블루 레인코트’가 쓸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버스에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며 색소폰 소리가 버스 안의 풍경과는 다르게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들은 말없이 버스를 타고 있다가도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면 손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괜찮아’ 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면 상대방은 억지로 미소를 그리며 푸석한 머릿결을 매만져 주었다. 황량한 곳으로 가는 개척자들의 모습처럼 보이는 그들]


 그녀의 입술은 그런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웠지만 닿을 수 없는 지쳐버린 아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시간은 뒤로 돌아가는 성질이 없지만 나는 그때 시간이 후퇴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입술 감촉과 내 눈으로 들어온 눈 감은 그녀의 이마와 얼굴은 나를 2년이나 뒤로 회귀시켜 주었다. 도달할 수 없는 어느 곳으로 그녀의 입술은 나를 데리고 가버렸다. 채 5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한 시간이 지나가버린 것처럼, 혹은 0.2초도 걸리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은 나를 이질적인 시간 속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 내 등에서 분명 땀방울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내 양손은 침대보를 꽉 붙잡고 있었고 등을 꼿꼿하게 펴고 있었다. 제니퍼 원스의 ‘페이머스 블루 레인코트’가 막바지에서 색소폰이 진액을 쥐어짤 때 그녀의 입술에 나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거짓 없는 마음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웠다. 애매한 상황은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일까.


 입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그녀에게 어떤 호기심이나 불운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헤매고 있었다. 아예 나를 호기심쯤으로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더 쉬워질 수 있지만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선배도 나도, 까지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힘이 들었다. 몹시도.


 등에는 악마의 땀이 계속 흘렀다. 내가 겪고 있는 혼란은 해체 후 조립해 놓고 보니 하나 남은 부품이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꼴이었다.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당신은 아직 여자와 키스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당신은 슬픔을 잔뜩 지닌 채 태어난 사람 같다고 말이에요. 나는 웃었는데 그 사람은 그때 웃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정말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당신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신기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고 했어요.”


 그녀는 잠시 숨을 쉬었다. 어떤 큰 결심을 하듯이.


 “그 사람은 당신을 무척 생각하고 있어요. 후배로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에요. 그거 알고 있죠?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 당신을 대할 때 분명히 달랐어요. 그건 표면적으로 빛이 몸에 떨어지듯이 보이는 것이 아니었지만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에게서 흔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그 사람이 한 번은 제게, 당신에게 여자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게 어때?라고 말했어요. 참 이상한 사람이죠. 자신의 여자에게 말이죠. 그때는 흥 그랬는데 막상 당신을 보니 그 말이 이상하지 않게 다가왔어요. 세상에는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악마의 땀은 증식했다. 숙주를 통해서 안전한 곳을 택해서 그곳을 기점으로 악마의 땀은 점점 불어났다. 몹쓸 것이 어두운 곳에서 자신의 개체를 늘려가듯 증식했다. 기분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방 천장에서 얼마 전에 거둬 낸 볼품없고 질서 없이 쳐져 있던 거미줄이 된 기분이었다. 귀가 달아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제니퍼 원스의 ‘페이머스 블루 레인코트’가 다시 흘렀다. 숨이 조금 찼다.


 “그렇지만 내 마음도 있었어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에게서 나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정말로.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하진 않을게요. 저도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해는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요. 당신을 본 순간부터 당신과 마주 대할 때마다 당신의 모습은 저의 모습을 많이 닮은 듯 보였어요. 왜 그럴까요? 당신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것 말이에요. 내 말에 당신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분명한 건 당신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간 것은 내 의자였어요. 그 사람이 시켜서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팔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누군가 나의 팔에 칩을 심어 놓고 조종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가슴을 잡는 순간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떠올랐다.


 ‘그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물가로 밀려온 고래의 잔해, 사람의 발자국, 조분석으로 이루어진 섬들이 하늘과 흰빛을 다투고 있는 먼바다에 고깃배 같은 것들이 이따금 새롭게 눈에 띌 뿐, 모래언덕, 바다, 모래 위에 죽어 있는 수많은 새들, 배 한 척, 녹슨 그물은 언제나 똑같았다. 카페는 모래언덕 한가운데 말뚝을 박소 세워져 있었다. 도로는 그곳으로부터 백 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으므로, 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과 다르게 그녀의 가슴은 내가 인식하려는 것과 실제의 인식 그 사이에 있는 다루기 힘든 고독이었다. 이내 손을 떼고 말았다. 열 살이나 되어서 바지에 오줌을 지린 것처럼 나는 무엇을 잘못한 사람처럼 당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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