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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05. 2022

바람이 불어오면 9

소설


9.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세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내 방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안은 그녀의 비누향이 아직까지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방안에 머물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오른손을 보았다. 세 시간 전에 나는 내 오른손으로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만졌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동시에 과거가 되어 버렸다. 선명한 아침햇살을 받은 기억이 금세 과거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그녀의 가슴을 만졌던 현실은 과거가 되어 버렸다.


 두두둑 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하늘에서 비가 막힘없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비가 된다면 선배와는 무관하게 그녀가 있는 곳에 그대로 떨어질 수 있을 텐데. 그녀의 모습을 딱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 흩어져도 좋을 것이다. 하늘은 슬픈 일이 있어서 크게 우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땅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연한 사실인데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방안의 작은 창을 조금 열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기말고사가 끝이 나면 자취촌은 고요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학생들만 몇몇 남아서 냉기 어린 자취촌을 지킬 것이다.


 집으로 가지 않는 사람 중에는 선배도 속했다. 방학 때에도 언제나 바빴고 자신의 식사는 자신이 해 먹었다. 선배는 어쩐지 집과는 왕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는 자신의 집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건 나와 같았다. 나 역시 우리 집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승섭이 빼고.


 선배는 방학이라고 해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처럼 와아 하며 신나게 집으로 가서 부모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편안한 대우를 받는 것을 경멸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무위도식하는 대학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될 가망성이 많다고 했다. 선배는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정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방안의 카세트를 틀었다. 카세트의 촘촘한 스피커의 틈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로저 워터스에서 데이빗 길무어로 바뀐 핑크 플로이드가 ‘디비전 빌’을 연주하고 있다. 이지러진 세계로 이끄는 음악이었다. 그런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계다. 이 세계에는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도 존재한다. 열린 창문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비를 손바닥에 받았다.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차갑고 슬펐다. 손바닥에 닿은 비도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곧 떨어져 없어질 거라는 슬픔.


 하늘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씩의 아픔을 거둬들였다가 다시 비로 환생해 땅 위로 내려앉아 세상을 촉촉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비의 삶은 너무나 슬프다. 계절의 끝에 쏟아지는 비는 더욱 차갑고 몹시 슬프다.


 학교생활은 똑같았다. 비슷하게 흘러갔다. 세상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생활은 단순하게 반복될 뿐이다. 누구나 일탈의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이 길어지면 일상의 편안함을 그리워한다. 수업이 끝나면 모임이나 학과의 참견을 뒤로하고 빠르게 자취방으로 와서 침대에 누워서 그녀를 생각했고 오른손을 펼쳐 보았다. 그러다가 선배에게 두들겨 끌려가서 밥을 먹었고 선배의 방에서 선배가 하는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들었다. 선배 옆에는 그녀가 늘 있었다.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각각 자신의 자취방에서 밥과 반찬을 들고 왔다. 늘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포틀럭의 모습이 되었다. 게 중에는 얼굴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다른 과에서 선배의 방으로 온 사람이었다. 아마 이 자취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방학이 가까워오자 자취촌에는 사람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선배의 방에서는 여럿이 모였다.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웃음과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쓰레기통에는 차곡차곡 쓰레기가 쌓였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시간은 주전자의 물이 빠져나가듯 흘렀다.


 “옷 만들어 내는 게 쉬울까요? 옷을 입는 게 힘들까요?”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게 힘들까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게 쉬울까요?”


 “옷 만드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 까요? 건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돈을 많이 써버릴까요?”


 그녀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고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말했다. 서로 술잔이 오고 갔고 때로는 격렬하게, 대론 진지하게 대화를 했다.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의 면모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마음 놓고 당구나 치고 술이나 퍼 마실 수만은 없었다. 누군가 밖에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행복에 겨워 저녁을 맛있게 먹고 이야기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 화면에서 나는 찝찝한 벌레 같은 존재로 있었다. 여느 때처럼 그들의 틈 속에 있다가 털옷에서 한 가닥 빠져나가는 실오리처럼 내 방으로 와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조금 먹은 밥의 양에 비해 위장에 쏟아부은 소주의 양이 훨씬 많아서 그런지 누우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책을 집어 들었지만 그녀와 일이 있기 전처럼 책에 몰두하지는 못했다. 내 방에는 그녀가 남겨놓고 간 모종의 슬픔이 잔존해있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슬픔은 방 안의 저쪽 구석에 환영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방에 들어오면 강아지처럼 나를 반겼다. 얼굴을 핥았고 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작 두 달 된 강아지처럼.


 진저리가 날 정도로 비가 차갑게 내렸다. 가을비가 자주 내렸고 한 번 내리면 오래 내렸다. 비 냄새가 창을 통해서 바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녀가 남긴 슬픔을 몰아내기에는 터무니없었다. 억지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알 수 없는 슬픔의 잔존감을 마음으로 느끼며 책을 읽다가도 그녀를 생각했고 음악을 듣다가도 그녀를 생각했다.


 그때 이후 그녀는 내 방에 오지는 않았다. 그녀가 방에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녀의 가슴이 느껴졌다. 만약 지금 문이라도 열고 들어 온다면 어쩌나 하는 조마조마함을 자취방에서는 늘 느꼈다. 그리고 더 깊은 마음속에는 그녀가 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모순에 모순을 장착한 로봇이었다. 이런 내가 건축을 한다니, 건축물을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얼토당토 안 될 말이다. 그런 내가 지긋지긋했다. 맥주를 마셨다. 소주가 위장에 아직 찰랑거리고 있었다. 희석주에 발효주가 들어갔다.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게으른 인간이 리모컨을 만든 거야, 라는 말을 되새기며 나는 침대에 한 번 누우면 그대로 침대에 붙어서 꼼짝하지 않았다.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만나면 이야기를 잘해주었고 책에 대해서 물었고 음악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비틀스가 나을까? 에릭 클랩튼을 선택할까? 그녀는 내 방에 다녀 간 이후로는 나에게 말을 놓았다. 나는 그런 그녀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낯설지 않음은 어떤 전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주말에 선배와 그녀는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나를 데리고 동물원으로 갔다. 나는 동물원에서 기린의 우리 앞에서 기린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동물원에도 왕왕 갔었다. 하지만 동물원은 언젠가부터 가지 않게 되었다. 어떤 법칙도 없이 어느 날 문득 가지 않게 되는, 그런 곳이 존재한다. 오락실도 그렇고 극장도 그렇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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