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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09. 2022

바람이 불어오면 13

소설


13.


 나는 그녀의 가슴을 만졌을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가늘게 보이는 그녀의 어깨는 약간 들썩 거렸다. 존재라는 큰 부착물에 오점이 생겨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그 아름다움이 무서웠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 미질 덕분에 비극이 시작된다. 순수한 것이 무서운 것처럼.


 그녀가 오열을 했더라면 위로에 있어서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흐느낌에는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흐느낌이라는 건 그런 기운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그녀가 벌써 사라지려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일단 들고 나니 두려웠다. 그렇지만 흐느끼는 그녀를 위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흐느끼는 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울면 울게 내버려 두는 일.


 ‘숲’에는 다시 라디오 헤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김 씨 아저씨는 파블로 허니의 앨범을 틀었다. 파블로 허니가 ‘숲’의 공간을 헤집고 다녔다. “이 녀석은 천재야. 아마도 음악에 묻혀버릴걸”라고 김 씨 아저씨는 라디오 헤드를 들으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앨범 속 톰 요크의 목소리는 비에 젖어 들어 그녀를 울렸고 내 마음에는 슬픔으로 침잠되어 갔다. 어디에서 오는 슬픔인지, 어떤 슬픔인지 인지도 못한 채. 술을 마셨고 그녀가 울고, 톰 요크가 마음을 건드리니 슬픔이 오는 것이다. 그저 그런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슬픔 하나 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그녀의 차가운 손등을 문지르며 ‘숲’에 흐르는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Thinking About You’가 나오고 있었다. 노래를 듣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은 없었다. 테이블 위의 계란말이는 공기에 노출이 된 지 꽤 되었는데 젓가락으로 건드린 모양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시험을 하루 이틀 앞둔 학교 근처의 술집은 한산했고 잔에 따른 소주는 조금은 차가움이 빠져나가 미지근했다. 더불어 그녀의 손에서 냉기도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선배는 같이 오지 않았다. 그녀만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어깨를 들썩인 채로. 침착하고 환하게 웃던 그녀에게 그 둘이 빠져나가고 나니 그녀도 인간다워 보였다. 그녀의 눈물은 그녀의 깊은 골을 따라 흘러내렸다. 시작이 어디인지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답답했지만 나는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 있고 싶었다. 내 속의 나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잔혹한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시계에서는 음악을 음장 기기에 집어넣어서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변변찮은 결핵의 약이 없었던 것처럼, 스무 살이 되지도 않았는데 가랑이를 벌려야 하는 잔혹한 세계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잔혹한 세계에 들어가고 싶었다. 들어가서 힘은 없지만 그곳에서 음악을 들려주고, 결핵이 나을 수 있는 약을 먹이고, 가랑이를 벌려 가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미미한 힘이라도 그녀의 세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마음의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앉아있던 작은 불안이 꿈틀거리며 스멀스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서 편치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종의 마음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앉아 있었지만 만질 수 없는 곳에 앉아있는 새처럼 멀기만 한 존재였다. 닿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을 떠올리니 부서진 재처럼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이마에 그림처럼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치워주고 싶었다.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난 아직도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문득 승섭이의 붕대 감은 손이 떠올랐다. 엄지가 없으면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주물러 줄 수가 없다. 그녀의 차가웠던 손은 어느새 따뜻한 온기를 지닌 작고 아름다운 손으로 변했다.


 “고마워”라고 적요하게 그녀가 말했다.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뺐다. 순간 따뜻한 공기가 확 밀려 날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소주잔에 있는 소주를 천천히 마셨다.


 “저기, 부탁이 있어. 오늘은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을래? 그냥 아무런 말은 하지 말고 그래 주지 않을래? 아니 그렇게 해줘. 그래 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입술을 손등으로 닦은 다음 초승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저를 믿을 수 없어요.”


 “너를 믿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 둘 사이의 어떤 벽은 관념 같은 것으로 마모시키면 돼.”


 그녀는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녀의 얼굴은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소는 얼굴을 예쁘게 만들었다. 미약하고 돌 같은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단 하나의 미소였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너의 방은 다른 남자들의 방처럼 냄새는 나지만 온기가 있어. 때 묻은 벽지와 꺼져가는 침대에서, 그리고 방앞을 지날 때면 언제나 흘러나오던 오래된 노래에 온기가 묻어 있었어.” 그녀는 소주를 한 잔 마셨다. 내일이 시험인데 그녀는 내일 숙취에 오늘 먹은 술을 다 토해낼 것이다. 소주는 그런 악마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시간이 좀 지나면 또 소주를 찾게 만든다. 이상한 세계다.


 이번에도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고개만 끄덕이기 미안해서 나도 소주를 입에 부었다. 더 이상 소주는 달지 않았다. 쓴맛이 입안을 한 번 휘몰아친 다음 달달한 맛이 뒤따라와야 함에도 휘몰고 난 후 그대로였다. 혀끝은 소주 속의 올리고당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여섯 병의 소주가 내용물이 빠져나갔다. 계란말이는 조금 흐트러졌지만 그녀도 나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분명 김 씨 아저씨가 우리를 혼낼 것이다. 그의 열정과 수고가 들어간 작품이었다. 맛있게 먹어주는 학생들이 있기에 ‘숲’은 오래 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음식을 남기면 항상 호통이 뒤따랐다.


 “만드는 이의 성의와 영양가 없는 음식에 굶주린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라고 운을 땐 다음 뒤에는 거친 말들이 김 씨 아저씨의 입에서 십이지장처럼 나왔다. 그녀는 곧 호통을 칠 김 씨 아저씨에게 소주를 한 병 더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얼음장 같은 손이 아니었다. 가슴과는 또 다른 부드러움이 가득한 작고 따뜻한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사람은 말이지 이미 오래전에 내 몸을 떠나가 버렸어.”


 너무나 조용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말을 알아듣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마음은 그대로인데 육체만 빠져나가 버렸다는 말일까. 채 알아듣기도 전에 그녀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말은 비정상적으로 또박또박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술에서 점점 깨어나는 듯보였다. 애당초 술에 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나 말고 다른 이가 이미 들어가 있었던 거야. 방학 때마다 실무를 배우는 건축가 사무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만났나 봐.” 그녀는 다시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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