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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10. 2022

바람이 불어오면 14

소설

14.


 선배는 누구보다 건축에 열심이었다. 집요할 만큼 매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미래가 송두리째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교수들은 선배를 졸업과 입대를 하기 전에 건축의 실무를 맛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선배는 건축의 실무 속으로 뛰어들면서 일종의 열정이라는 것의 부피가 커졌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은 조금씩 식어 들었다. 걸걸한 목소리에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과 활달한 성격만 보더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 건축에 다가가는 것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불도저와 같은 모습이 선배에게는 잘 들어맞았다. 선배는 교수를 졸라 방학이 되어도 집이 있는 타 지역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서 건축사 사무소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도 벌면서 공부도 병행했다. 그리고 사무소에서는 현장 실무팀에 선배를 파견시켰다.


 그곳은 선배가 원하는 건축분야였다. 물론 설계를 하고 모델링을 만들고 프레젠테이션도 흥미 있는 분야였지만 실제로 건축물이 올라가는 모습에 선배는 흥분된다고 했다. 건축이라는 일은 미쳐있지 않으면 매달려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건축 관련 일을 하며 정시 퇴근, 정시 출근하는 사람들은 잘 없다. 도시건축 업무를 보는 공무원들도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만약 일정한 월급을 받으며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다면 늘 똑같은 양의 할당된 도면만 오더 받아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건축물과 건물의 아름다움, 기능적인 면을 살리기 위해 실질적인 건축가들은 오늘도 사무실의 한편에서 밤샘을 하며 건축에 힘을 쏟고 있다. 그건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다. 버스에서 메탈리카의 노래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인류가 들어앉아서 생활하는 건축물은 좀 더 단단하고 좀 더 안전하고 예술적으로 변하고 있는 형국이다. 선배도 건축에 있어서 그러한 사람들에 속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다. 방학 동안에는 선배뿐 아니라 그녀 역시 자취촌에 남아서 웨딩 업체에서 아르바이트와 의상 공부를 하며 선배에 비해 비교적 집이 가까워 주말마다 다녀오곤 했다. 두 사람은 저녁이면 선배의 방에서 식사를 했고 이야기를 하며 사랑을 나눴다.


 “감정이라는 게 정말 솔직하지 못한 걸까요?”


 “감정이라는 건 믿을 게 못돼, 정말로.”


 “어째서죠?”


 “감정이니까 그래. 늘 불편한 감정을 숨기며 말해버리잖아. 감정 같은 건 믿지 말아야 해.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어서 믿어야 해.”


 “어째서죠?”


 “믿을 수밖에 없는 건 절실하기 때문이야. 간절함을 가지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걸 믿는 거야.”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이대로만 간다면 잔잔한 수면처럼 그들의 미래가 불안하지만은 않다고 느낄 수 있었다. 선배와 그녀는 밤이 되면 마른 장작처럼 불타올랐다. 그들의 사랑은 쇠처럼 단단했고 물처럼 부드러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잔뜩 느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더 불안했다.


 선배가 건축사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넘어서부터 선배에게도 떨어진 할당량이 많아졌다. 회사에서 아직 학생이었던 그를 인정했다는 말이다. 학기 중에는 학교 수업을 빠지는 일도 많아졌다. 선배와 같이 듣던 수업에 선배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교수들은 선배의 사정을 잘 봐주었다. 출석은 사무소 출근으로 대신했다. 건축사사무소에서 일을 하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교수들과 친분이 있거나 같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역시 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는 실제와 많이 달랐기에 현장에서 경험 쌓는 선배가 오랜만에 학교에 나타나면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보다 월등히 앞서 나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2학년 겨울방학이 되면 그는 그녀를 놔두고 입대를 해야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무더운 밤공기 속에 창문을 열어놓고 돌아가는 선배의 방에서 두 사람은 식사를 했다.


 “나, 드디어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나 봐. 내일부터는 나도 바빠지려 할 것 같아. 현장설계 파트에 투입이 되려나 봐. 축하해 줄 거지.”


 그는 썩 시원하지 않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고 그녀 역시 그의 맞은편에서 미지근한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그녀가 느끼는 건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불안함이었다. 그에게서 느끼는 이 미묘한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은 정서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장에서 꿈틀대는 작은 기생충 한 마리가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이물감이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맛있게 오이냉국과 냉채와 바싹하게 튀겨낸 돈가스를 두 사람은 그대로 두고 미지근한 맥주만 마셨다. 그들은 만찬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땀을 흘리며 그날 밤 진을 쏟아냈다. 내내 드는 미묘하게 이상한 기분.


 선풍기 한대로 무더운 여름밤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두 사람은 작은 욕실에 들어가서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물을 들이붓고 나와서 닦지도 않은 채 다시 서로를 끌어안고 물기를 땀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이 시간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생각은 늘 그렇듯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음날부터 그는 정말 바쁜 모양이었다. 열 시가 넘어서야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나마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어야 그 시간이었다. 일을 마치면 배가 고프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며 술을 마셨다. 그는 피곤했고 집에 오면 샤워를 마치는 동시에 그대로 수마에 뇌를 줘버렸다. 술을 많이 마신 날은 땀에 절은 옷을 입고 그대로 방에서 뻗었다. 저녁에 두 사람이 같이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하는 공유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 역시 바빴고 같이 식사를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그것대로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에게 해야만 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밤 열 시를 넘어 들어오던 그의 도착시간은 자정으로 바뀌었다.


 날이 갈수록 그 시간을 넘어서야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의 옷에서 기이함을 발견한 것은 새벽 두 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아서 그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던 날이었다. 프레타포르테, 빅토리아 시크릿의 잡지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속옷의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였지만 잡지 속의 란제리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그가 들어왔고 취기는 이미 수위를 너머 섰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얼굴에서 벗어나 있었다. 얼굴에 그가 아닌 다른 남자의 가면이 붙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땀을 흘리는 그를 씻기려고 했지만 이미 몸을 가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저 옷만 벗겨서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 주려고 등을 돌렸다. 입고 있는 옷이 안감과 겉감이 뒤집어져 있었다.


 어디에서 한 번 벗었다가 입었을까.


 그런데 왜 뒤집어 입었을까.


 바빠서 그랬을까.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옷을 벗었다가 다시 입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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