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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11. 2022

바람이 불어오면 15

소설


15.


 그녀는 모든 게 이상했다. 같이 잠을 못 잔 지 오래되었다. 그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늘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녀는 땀에 절어있는 그의 옷을 벗겼다. 옷이 벗겨진 등에는 무엇으로 맞은 자국이 가득했고 그 무엇은 줄이나 채찍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 순간 무서운 생각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피가 나진 않았지만 피멍이 돌이킬 수 없는 자국처럼 남아있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누르면 피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피가 깊게 배어있는 난도질된 멍든 자국은 그녀를 불안한 상상의 세계로 마구 끌고 들어갔다. 그녀는 그에게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물어보는 것이 겁이 났다. 불안한 방향의 촉은 언제나 들어맞는 게 무서웠다. 그녀는 그와 결혼해서 살아가는 그림을 그려왔다. 둘이서 서로 깍지 끼고 좁은 방이라도 같이 앉아서 밥을 먹고 서로 얼굴을 핥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녀는 의상 쪽으로 하는 일에서는 야망을 보였지만 생활은 소박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등을 보는 순간 어떤 알 수 없는 불길함으로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 일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걱정이 결락으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현실의 칼날이 마음에 쌓아놓은 탑을 여지없이 잘라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일이라는 건 어김없이 일어나고 만다. 마음속에 중심이 되었던 굵은 기둥이 현실의 칼날에 가차 없이 베였다.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얼마 전 여름의 한가운데서 나눈 사랑이 마지막이었다. 쓸쓸하고 슬펐다. 무엇보다 공포가 밀려왔다. 그녀는 몸이 떨렸다. 전동기의 모터처럼. 그는 자정이 다 되어서 집에 들어오거나 자정을 넘어서 들어오는 게 확정된 경기 일정처럼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지 않았고 그녀의 자취방에서 잠을 청해 보려고 노력했다. 마음을 움직이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토록 힘이 들 줄은 몰랐다.


 감정은 정녕 믿을 만한 게 못 되는 것일까.


 감정에 충실하면 정말 지게 되는 것일까.


 의식은 깨어있으나 생각은 스위치를 끈 방안의 불빛 같았고 잠이 들었지만 끝내 무의식으로 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그도 그녀가 자신의 몸에 생긴 혈흔을 보고 자신에게 내심 선뜻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 아픈 머리가 일어나라고 신호를 보내서 눈을 떴더니 옆에 벗겨진 옷이 빨래가 되어 있었다. 등에는 안티푸라민이 발라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서 알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 앞에 서면 입 밖으로 나와야 하는 말이 제 기능을 잃고 목구멍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그녀와 마주 대하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사람들과 함께 야식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젊음도 피곤에는 이기지 못했다. 몸은 깨어나서 그녀에게 말을 해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다른 방향으로 자꾸 걸어갔다. 그녀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의식은 붕붕 떠다니는 구름처럼 멀리 있기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건축 일은 바쁘기만 했다. 회사에서 맡은 현장 공사가 마무리에 가까워져 갈수록 현장의 사이클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노가다는 해가 떨어지면 멈춘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할 시기를 계속 놓치고 있었고 회사에서 일을 마치면 그는 램프의 지니에게 끌려가듯 웜홀 속에 빠져 술을 마시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시들어버린 건초더미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2주일이 그렇게 흘렀다. 그동안 두 사람의 사이에는 공백의 골이 깊어졌다. 공백은 우울했고 이전의 두 사람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이야기를 할 시기를 잡기가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마음이 멀어진 것에 대한 이유를 찾기보다는 멀어졌다고 느껴지는 무력감을 감당해내는 게 급선무였다. 이대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는 그대로 무너질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지구에서 달까지 왕복한 거리를 뛴 자동차만큼 힘들고 지쳤다.


 자취 촌 곳곳에 땅을 뚫고 올라온 나무에서 매미가 서럽고 사정없이 울어대던 어느 날 그녀는 맥주를 혼자 마시다가 그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시간은 오후 일곱 시쯤이었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한 날이었다.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그녀는 사물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살아있는 세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능력과 가치관이 얼마나 자랐는지 키를 재듯 자로 재보는 것 같았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공산품인데 규격에 맞지 않으면 버릴 것처럼. 비로소 열기가 오르고 덥다고 느꼈다. 이해관계에 대해서 이대로 불편하게 끝난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와서 괜찮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건축사 사무소는 모던한 분위기에 노출 콘크리트 마감이 된 6층의 세련된 건물에 있었다. 그녀는 건물 입구에서 간략하게 경비에게 용건을 말하고 3층에 있다는 그를 만나러 갔다. 대부분 퇴근을 하고 난 후의 시간이라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세련된 건물에 사람이 없으면 건물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압도당할 수 있다. 그녀가 신고 있는 깨끗한 운동화마저 반질한 바닥에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이질적인 소리를 냈다. 이곳에 오면 안 돼,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거울 같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십 년은 늙고 초라하게 보였다. 상처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자라서 이만큼의 그녀 나이를 갉아먹은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조금만 울어도 그가 알아챌 것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엘리베이터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비치는 모습은 일분 일분이 갈 때마다 비참함으로 물들어갔다. 그럴수록 선명하게 비쳤다.


 왜,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사람의 마음은 바뀌거나 떠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인 것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늙어가는 것이 인간이다. 배신하고 상처를 받으며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 인간, 사람인 것이다. 작은 돌에서 파문이 시작되지만 버드나무처럼 굳건한 것도 사람이다. 우주의 어둠을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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