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을 하는 걸까
인간은 왜
어째서 배설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배설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고 배설은 인간 생존에 밀접하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 배설을 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우리는 생활하지만 만약 배설을 하지 못하게 되는 처지, 또는 환경에 처하게 되면 인간은 두려움을 가진다.
하루 이틀 정도는 배설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몇 날 며칠을 그럴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배설을 하고 있는데 이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내가 구치소에서 정화조 처리 담당 보조를 맡은 적이 있었다. 구치소의 지하에 내려가면 정말 굉장하고 무시무시한 정화처리 기계가 있다. 지하에는 크고 작은 배관들이 인간의 혈관처럼 마구 꼬이고 늘어져 지하의 천장을 타고, 벽면을 타고, 공간을 차지하고 뻗어서 구치소 내부까지 간다. 구치소의 지하는 보통 아파트 단지 지하의 몇 배? 몇 십배? 정도 크다.
그 배관들이 모이는 곳이 엄청나게 큰 정화조다. 정화조의 크기가 입이 쩍 벌어진다. 매일 쉬지 않고 돌아가는 소리가 지하라서 더 기기괴괴하게 들린다. 인간의 심장처럼 태어나는 순간 숨이 멎을 때까지 쉬지 않고 팔딱팔딱 뛰는 것이다. 만약 이 정화조가 일하기를 포기하고 멈추거나 고장이라도 난다면 구치소는 아마 재소자들과 법무부 직원들의 배설물로 펑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그때 들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동안 배설한 양 역시 실로 엄청날 것이다. 누군가가 그 양을 연구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 전날 먹은 음식에 따라 배설물의 양도 달라지지만 평생 모아본다면 한 개인의 몸에서 나온 양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일 것이다.
향수와 지하도가 발달한 프랑스의 오랜 배경을 둔 소설이나 영화들을 보면 - 레미제라블이나 향수 같은 영화 속 프랑스 땅은 늘 축축하고 아주 더럽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길거리를 걷다가 배설이 하고 싶으면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길거리 아무 곳에서 배설을 했다. 그러다 보니 강간 같은 일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났고 여성들은 10대에 이미 출산을 여러 번 하게 되었고 40대가 되면 지금의 6, 70대 같은 모습이었고 대부분 빨리 죽었다.
귀족이나 왕족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건 베르사유를 산책하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드레스를 입은 채 걸어가면서 그대로 소변을 봤다. 베르사유 정원에 화장실은 없었다. 코르셋을 비롯한 드레스를 입고 벗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대로 소변을 보고 말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소변이 발에 묻지 말라고 굽이 높은 힐이 발전을 했고 소변의 지린내를 지우기 위해 향수가 발전을 했다. 그러다 보니 땅 위에 배설을 너무나 해서 지하도를 뚫어 그때부터 발달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참 이상하고 모순적이다. 이 배설의 공간으로 쾌락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같은 쾌락에 대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를 구별하지 않고 인종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그 쾌락에 접근을 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중에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건 인간밖에 없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질서를 유지하다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이 배설을 건물의 복도나 계단 같은 곳에서 아무렇게나 하면서다. 앞이 보이지는 않지만 코를 찌르는 배설의 냄새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 극도의 불안은 공포를 불러들이고 두려움을 가지게 만든다. 결국 배설을 하고 뒤처리를 하지 못해 옷에 묻고 옆 사람에게 다가가는 그 간격의 좁힘 속에서 갈등과 싸움이 벌어지고 그 속에서 마저 권력을 가진 자는 무너진 세계에서 쾌락을 추구한다.
자신의 집에서 변기가 막히기만 해도 앞이 깜깜해진다.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텐트촌에서 가장 필요한 건 식량이기도 하지만 배설을 위한 화장실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건 공중화장실의 위생과 집처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서다. 내가 있는 바닷가에 코로나 이전에 매년 놀러 왔던 나의 여사친과 결혼을 한 영국 사위 존은 바닷가의 공중화장실을 보며 늘 놀라는 말을 했었다. 영국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렇게 해변에 있는 공중화장실이 모래 알갱이 없이 깨끗한 데다 무료로 사용을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단체로 생활하는 곳에 배설을 근처 아무 곳에나 한다고 생각을 하면 여지없이 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배설은 운명을 넘어 숙명이다. 앞에서 오는 운명은 어떻게든 내가 만들어서 비켜가거나 바꿀 수 있지만 뒤에서 서서히 오는 숙명은 보이지 않아서 피할 길이 없다. 배설은 숙명과도 같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다. 인간은 그렇게 똥을 싸질러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텐트촌이 갇히게 된 것에는 정치가 개입이 되었다. 정치인은 왜 수치심을 모르는 것일까. 도대체 정치인은 어째서 국민들을 개돼지로 보는 발언을 아무렇게나 하고 난 뒤에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좀 잘 나가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유명인들이 얼굴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면 공격을 받는다. 나와는 생각이 다르군, 나와 다른 정당을 응원하는 군, 하고 그것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유명인이 정치적인 색을 드러내고 발언을 하면 다른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공격을 받는다.
사실 정치는 시민이라면, 국민이라면 모두가 다 정치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명절에 떨어져 있던 형제들, 친척들이 모이면 늘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가 싸움을 하게 되고 멱살을 잡기도 한다. 유명인들 또한 자신이 응원하는 정당이 있을 것이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이 드러나는 어딘가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나면 힘겨운 매일을 보내게 된다.
정치에 중독이 되면 마약보다 끊기가 힘들다. 정치가들이 어째서 기를 쓰고 쓰레기 난장판 같은 정치계를 떠나지 못하고 임기가 끝날 때 다시 출마를 하고 선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를 욕망 그 위의 야망이라고 한다. 한 번 잡은 권력의 맛을 절대 끊을 수가 없다. 주위의 측근들이 왕처럼, 신처럼 떠 받들어준다. 공개된 공간의 무대에 오르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 수많은 관중이 자신을 향해 환호를 하고 응원의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열광하는 모습에 그만 정신을 빼앗기고 나면 이 세계를 더 이상 떠나지 못한다.
정치인이 된다는 건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력, 이력 과거까지 그리고 가족도 비밀을 가지지 못하게 모두 까발려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하지만 정치에 중독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정치계에 몸을 던진다. 정치는 영화만큼 극적이며 스포츠만큼 예측에서 빗나가는 감동이 있다. 이렇게 정치인이 되어 정치인의 옷을 입는다면 수치심이 없어진다. 인간이 외진 곳을 운전하며 가다가 느닷없이 배설이 하고 싶어 산속에서 배설을 하는데 그 앞에 개나 고양이가 있다고 해서 창피하다며 옷을 입지는 않는다. 개와 돼지 같은 동물 앞에서는 우리는 수치심이 없다. 정치인이 수치심이 없는 발언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엄청난 지진이 터졌을 때 그 나라 대통령은 모든 시장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을 밀어준, 자신의 속해 있는 당 출신 시장에게만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좀 더 구출하고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갔다.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에세이에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국가는 당신을 모른다'라는 챕터가 있다. 국가는 개개인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정부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 움직이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오래전에, 이미 국민이 존재하는 이유는 국가가 있기 때문이고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만 다 던져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글만 쓰고 있다. 재난 자본주의는 국가와 권력자의 이익에 부합되며 일반 시민들은 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기만 한다.
인간은 왜 그럴까.
오늘의 선곡은 안타까운 돌로레스가 있는 크렌베리스의 좀비 https://youtu.be/8MuhFxaT7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