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버크 화이트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 중에 [마가렛 버크 화이트]라고 있다. 그녀는 히틀러 유태인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여성 종군기자였다. 그녀에 의해서 유태인 학살의 실태가 드러났다.
마가렛이 사진을 촬영한 당시는 1930년대에서 50년대로 이 시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밀려들어 온 경제공황과 공산국가의 탄생, 나치즘의 대두와 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지구는 그야말로 혼돈과 폭격의 도가니였다.
마가렛의 사진 속에는 이러한 참상과 국제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여성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개척자의 정신으로 밀고 나갔다. 마가렛의 사진은 전부 유명하다. 히틀러를 피해 크렘린 궁으로 숨어 들어간 스탈린의 초상화를 담아낸 것부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이라면 물레를 돌리는 간디를 담은 사진이다. 마가렛은 무정부주의자였던 간디와 함께 물레를 돌리는 방법을 배우고 그토록 만나고픈 간디와 친해진다. 그리고 간디의 모습을 담았다. 좋은 사진을 담아낸다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 또는 태도에 있다. 그 사진을 촬영하고 불과 몇 시간 뒤에 간디가 암살되었다.
그녀는 51년에 위태위태하게 비행기에 올라 곡예사와 같은 모습으로 경제공황에 시달리는 미국의 모습을 담아낸다. 세계대전 속에서 피어나지도 못하고 그저 시체 1이나 시체 2로 전락해 버린 나치의 수용소에서 무참히 죽은 유태인들의 참상도 여과 없이 담았다.
마가렛의 사진은 열정이 아니라 신념이었다. 스탈린의 초상화가 너무나도 유명한데, 1942년 6월, 히틀러가 모스크바로 직격작전을 개시한 때, 모스크바는 당시 독일군에 의해 완전히 개박살이 났다. 그 공습 하에 마가렛은 소설가인 남편 콜드웰과 모스크바에 있었다. 마가렛이 그 혼돈 속에 있었던 이유는 미로 속과 같은 크렘린 궁 깊숙이 들어앉아있는 스탈린을 담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는 모스크바 거리를 촬영한다는 것은 초보 등산객이 히밀라야의 로체를 등반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마가렛은 호화스러운 지하철로 파고들어 그곳에 피난하고 있던 모스크바 시민의 모습을 담기도 했고, 옥상에서 불타는 거리의 정경을 담아냈다. 마가렛은 전쟁이 비정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스탈린을 담는 것은 절망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 홉킨스가 스타린을 회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던 것이다. 마가렛은 이 기회를 이용했다. 홉킨스 특사를 수행하여 크렘린 궁 속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궁은 마치 에셔의 그림 같았다. 몇 개의 방을 거치고 미로와 같은 복도를 돌아 지나갈 때 우연히 스탈린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스탈린의 표정은 갖은 상념이 뒤섞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조립 카메라를 재빠르게 조작하면서 어떻게 이 표정을 담아낼까 생각했다. 스탈린의 모습을 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가렛의 모습을 보고 스탈린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마가렛은 그렇게 유명한 스탈린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마가렛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담기 위해 한국에도 왔다. 한국전쟁의 처참한 모습 역시 사진으로 담아냈다. 종군기자들이 대체로 전쟁에서 많은 피해와 부작용을 겪는데 마가렛도 그러했다. 한국전쟁 중 뇌염에 걸리게 된다. 이는 파킨슨 병이라는 후유증을 겪으며 뇌 수술을 받는다.
투병 중에도 촬영을 했다. 그녀가 기억에 남는 사진은 한국 사진은 한 집안의 남성이 전쟁에 참여해서 전사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그 집의 아녀자들의 사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72년에 67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