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포포

구로다 후쿠미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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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탐미와 미식의 허영.

굴에 떨어진 피가 퍼지는 예술작품 같은 마법.

단 음식에 대한 인간의 갈망.

라면을 빨아 당겨 목구멍으로 넘기는 쾌감.

쾌락적 후추와 쾌락적 레몬을 젖가슴에 뿌려 먹는 욕망.

죽음을 앞두고도 끊을 수 없는 완탕면의 유혹.

인간의 미식을 채우기 위해 무수히 죽어간 생물들.

쾌락의 절정은 음식에서 완성되고.


담포포 속 야쿠쇼 코지와 함께 관능의 마성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여성이 나온다. 이 배우는 구로다 후쿠미로 아마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알고 있는 일본 배우일 것이다. 한국에서 책도 여러 권 출판했고,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려고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래전에 탁경현이라는 한국인이 가미카제 대원으로 출격하여 억울하게 죽었던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후쿠미가 탁경현이라는 한국인을 위해 비석을 세웠다. 이 탁경현이라는 사람은 일본 육군항공대 51진무대 소속 소위, 일본 이름 미츠야마 후미히로다. 사후 2계급 추서로 대위가 되었다. 한국인 탁경현은 당시 나이 25세. 고향은 경남 사천시 서포면이었다. 그럼 이 비석이 사천시에 세워져야 하는데 비석은 용인시의 법륜사에 세워져 있다.


탁경현은 여섯 살 때 지독하고 엄청난 가난으로 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했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인은 굉장한 멸시와 말로 할 수 없는 차별을 받고 편견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고개도 들지 못하며 살았다. 영화 파친코에도 잘 나오지만. 그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학업을 놓지 않고 약학 전문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고 한다.


그때 군국주의의 전쟁 광기가 최고조에 달한 일본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돌입한다. 전쟁이 길어지고 피해가 늘어난다. 또 전세가 날로 바뀌고 악화되자 일제는 한인들도 강제로 징집하여 전쟁 속으로 보내려 한다. 바로 총알받이로 죽음을 맞게 한다. 계속되는 패배와 함께 패전이 눈앞에 뻔히 보였지만 일본은 국민들을 속이며 입을 막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근래의 러시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무장도 안 된 병사들을 총검 만으로 기관총과 중무장한 타국 앞에 무작정 돌격하여 그대로 죽음으로 내몰았다. 현재 러시아 징집의 모습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당시 가망이 없는 곳의 주민들까지 자살로 내몰아 죽음을 강요하기도 했다. 어떻든 전쟁은 패망으로 가는 판국에 마지막 발악으로 나온 것이 일명 가미카제였다. 폭탄을 장착한 비행기를 그대로 적함에 부딪혀 죽음으로 일본에게 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면 이제 갓 비행기 조종만 배운, 앞으로 날아가는 비행 법만 배운 젊은이들을 한 번만 갈 수 있는, 편도행 기름만 넣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하늘길로 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공률이 거의 없었다. 그때 탁경현의 입대도 강요당했다. 입대를 거부하면 집안의 장사를 못하게 하고 일본에서 거의 생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탁경현은 입대를 하게 된다. 1945년 5월 10일에 탁경현에게 출격 명령이 떨어진다. 오키나와에 가미카제로 죽음을 맞이하라고.


탁경현은 그날 저녁 육군 지정식당에서 술 한잔을 마셨다고 한다. 식당의 주인아주머니가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시며 탁경현은 아주머니에게 마지막 가는 길에 고향노래를 부르고 싶다며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영화 호타루에서 출격 전날 밤 식당에서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1945년 5월 11일 8시에 출격하여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일본의 오키나와 상공에서 격추되어 일제의 가미카제 대원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을 위해 죽은 탁경현의 죽음은 숭고라든가 어떤 이름으로 포장될 것이 아닌 그저 일본에 의한 개죽음이었다.


그를 위해 여배우인 후쿠다는 탁경현의 비석을 사천시에 세우려고 했다. 후쿠다는 어째서 탁경현의 비석을 세우게 되었을까. 그녀는 꿈에서 그 당시의 전투비행사가 나와서 일본인으로 일본 이름으로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 꿈속의 비행사가 계속 맴돌아서 시간을 들여 그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고 그가 바로 탁경현이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천시에 비석을 세우려는데 사천시 시민과 광복회와 시민단체가 들고일어났다. 독립투사도 아니며 일제를 위해 죽은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위령비를 세울 수는 없다며 반대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반대에 부딪혀 탁경현의 비석은 사천시에 세우지 못했다. 그때가 2008년 5월 10일인데 그날이 아마도 탁경현이 출격하기 하루 전날이어서 그날로 정했던 모양이었다.


사천시에서는 후쿠미에게 연락을 해서 사천시의 상황을 전하고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비석을 세우는 제막식은 하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후쿠미는 다음 날 일본의 언론인과 사람들을 데리고 제막식을 강행하려고 했고, 당연하게도 난리가 났고 제막식은 열리지 못했다. 후쿠미는 그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섰다. 결국 비석은 탁경현의 고향인 사천시에 세워지지도 못하고 지금은 위에서 말한 용인 법륜사에 세워졌는데, 세워졌다기보다 비석이 넘어져 누워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후쿠다는 지금도 한국을 일본에 알리는 한국을 정말 많이 아는 일본 사람인데 탁경현의 비석에는 그를 추모하는 내용은 있지만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책임을 본질적으로 인정하는 문구가 없다. 후쿠다는 선의로 비석을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전 행적들을 보면 그렇다. 많은 한국의 도시와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그것에 의심은 없으나 그날 사천시에 비석을 세우려 하다 저지를 당해 쫓겨나는 모습이 대동한 일본의 언론인들에는 후쿠다의 선의가 반일감정이 강한 한국에서 무참히 짓밟혔다고 보였을 것이다.


후쿠미의 사진을 검색하면 대부분 한국에서의 사진이 검색이 된다. 한국의 도시에서는 그녀를 초대해서 한국의 홍보를 알리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구로다 후쿠미의 재미있는 사실은 27세 때부터 우리나라 배구선수 강만수 선수를 짝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 이야기가 일본의 배구 전문지 [월간 발리볼]에 자세히 소개가 될 정도였다. 강만수는 84년에 대표팀 은퇴를 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 대학에서 교육학과를 졸업한다. 젊은 강만수 선수 옆에 매미처럼 붙은 구로다 후쿠미의 사진도 유명하다. 아무튼 그런 후쿠미의 아주 젊고 아름다운 모습도 영화 탐포포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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