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의를 돈으로 환산하지 마세요!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무엇이든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 그 중에서 특이한 것이 사람의 혈액이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 ‘허삼관 매혈기’처럼 피를 사고 팔수 있는 나라들도 있다. 미국에서도 매혈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한국도 과거에는 매혈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왜 매혈이 사라지고 헌혈을 권장할까? 피를 돈주고 산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혈액은행에 피를 제공하지 않을까? 그런데 실제 결과는 그 반대였다. 헌혈하는 사람에게 현금으로 돈을 주면 그 사람은 모욕감을 느끼고 오히려 혈액 제공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영국 사회학자 리처드 티트머스가 1970년에 출간한 ‘선물관계 (The gift relationship)’에서 발표하였다. 티트머스는 1966년 영국에서, 1965-67년 미국에서 양 국의 혈액관리 제도를 조사하였다. 민영보험 위주의 미국은 혈액을 상업적으로 거래하고 수익을 추구하는 혈액은행이 많았다. 전 국민에게 보편적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국가보건서비스(NHS)를 만든영국은 무료로 혈액을 제공하는 헌혈제도를 운영하였다.
그는 양국의 헌혈제도와 매혈제도 중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이고 질이 좋은 혈액을 구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조사를 하였다. 이 조사 결과 영국인들은 성별·연령별·직업별로 전반적으로 고르게 헌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은 헌혈을 일시적 홍보나 요청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운다는 마음에 스스로 헌혈을 하였으며 또한 꾸준히 하였다. 반면에 매혈을 하는 미국은 혈액 제공자의 47%에 달했다. 티트머스의 분석에 의하면, 미국에서 거래되는 혈액의 질이 훨씬 더 나빴다. 심지어 간염, 성병, 마약중독에 걸린 사람들의 질 낮은 혈액이 공급되었다.
고려대 김윤태 교수는 티트머스의 책은 네 가지 중요한 발견을 제시했다고 했다. 경제학자의 예상과 달리 혈액 ‘시장’에서 자원의 ‘효율적 할당’이 이루어지 않았으며, 만성적 부족으로 균형의 개념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더 심각하게 오염된 혈액이 공급되면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만들었다. 둘째, 미국의 혈액 시장은 비효율적이었으며, 영국의 헌혈제도보다 5~10배까지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셋째, 혈액시장의 재분배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의 혈액이 부유한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넷째, 혈액시장은 궁극적으로 사회를 파괴했다. 헌혈을 위한 이타적 동기를 약화시키고 편협한 이기심을 조장했다. 사회적 가치의 핵심 문제를 다룬 티트머스의 연구는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는 제도가 오히려 실패할 수 있다는 역설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헌혈하는 곳에 가면 약간의 다과, 헌혈을 한 후에 일어날지 모르는 부작용에 대한 안내, 그리고 우산이나 영화 관람권, 학생들에게는 자원 봉사 시간증명들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공도 지나치게 물질적이라며 헌혈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오해시킬 수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물질적 혜택은 단기간에 간헐적인 헌혈 공급량을 늘릴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헌혈자가 줄어들어 공급량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피의 질도 낮아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티트머스는 현대와 같이 사회적 불평등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사회 통합을 위해선 이타주의에 따른 자원봉사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선의를 돈으로 주고 팔수는 없다. 특히 헌혈과 같이 나의 신체의 일부를 제공하는 행위는 온전히 내가 남을 도운다는 선한 의지에 의지해야 한다.
(출간된 '혼자 다 하려 하지마라'의 일부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