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없는 워킹맘 에세이
경험과 비경험 사이의 언어
인간에겐 세 가지 뇌의 영역이 있다.
본능의 뇌(뇌간), 감정의 뇌(변연계), 이성의 뇌(대뇌피질). 뇌간은 파충류도 갖고 있는 뇌이고, 변연계는 포유류들이 갖고 있는 뇌다. 인간만이 대뇌피질이라는 이성의 뇌까지 가지고 있다.
회사에서는 본능의 언어를 쓸 순 없다. 대뇌피질이라는 이성의 필터링을 거쳐 말이 나온다.
그러나 가끔, 그 대뇌피질 필터링 없이 말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상대방이 파충류나 포유류의 언어를 쓰면 나도 그 수준에 맞는 언어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언어, 도덕, 사고적 판단이 이뤄지는 대뇌피질의 존재가 무색해지는 순간.
나는 경험과 비경험 사이의 언어에서 그 순간을 경험한다.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예시1.
(육아휴직 후 복직한 여성 직원에게)
"잘 쉬다 왔어요?"
문장 자체만 보면 친절한 관심의 표현처럼 느껴지지만, 상황을 함께 보면 그렇지 않다.
발화자는 육아휴직=휴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은 법적으로 근무시간과 유사하게 적용되어, 근로법상으로도 휴직기간이 근속연수에 포함된다. 따라서 1년의 유급휴직기에는 급여도 나온다. 발화자인 그는 육아휴직을 사용했거나, 아주 밀접하게 간접경험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육아휴직(육휴)의 개념이나 육휴를 써야 하는 상황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의 의도가 나빴던 건지, 별 생각 없었던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의 비경험에서 발화된 언어가 상대방에게는 부당한 언어로 수용된다는 점이다.
그의 무경험에서 비롯된 언어가 상대방에게는 억울함을 파생시킨다.
누군가의 무지가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준다면, 어떤가?
그 무지는 '몰랐으니까 괜찮은' 성격의 것일까?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예시2.
(구정 전날 오후 3시경 사무실에서)
"오늘 구정 전날인데, 여자직원들은 준비할 것도 많을 테니. 빨리빨리들 퇴근해요!"
빨리 퇴근하라는 결론만 두고 보면 참 관용적인 언어다. 근로자 입장에서 조기퇴근은 언제나 희소식이니까.
다만, 앞에 전제조건을 보면 어떨까.
구정 전날, 여자직원이, 집이나 시댁에 가서 준비할 게 많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담고 있다.
이 말을 한 분은, 직급이 높은 남자 직원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구정 전날, 아내나 딸에게 어서 준비하라며 재촉해온 삶을 살아왔거나 여성이 구정전날 준비할 게 많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 삶을 살아온 사람일 테다.
그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는 그냥 그런 삶을, 응당 그래야 하는 듯이 살아온 것뿐이다.
하지만 듣는 이들은 어떤가. 구정 전날 무언가를 꼭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도, 실제로 준비해보지 않은 사람도, 혹은 그렇게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구정전날 여자직원이 어서 서둘러 퇴근해 명절 준비를 하지 않으면 잘못하는 거다.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의 감정이나 기분, 인지불일치로 인한 불편함은 고스란히 들은 사람의 몫이다.
그가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에 대해 기준을 제시하는 건 월권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이렇다.
(예시3)
"아니 애는 누가 키워요?"
아주 단순한 문장이다.
다만, 여기엔 많은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
(애가 아픈데) 엄마가 회사에 오면 애는 누가 키우나요?
(애가 어린이집을 혼자 다니지 못하는데) 엄마도 할머니도 그 시간에 집에 없으면 누가 키우나요?
(어린이집 방학기간인데) 엄마는 회사에 있고, 아이는 누가 보나요?
이 경우엔 무지와 의도 사이의 경계가 애매하다.
정말 내 아이의 근황이 염려되어 묻는 걸까, 아니면 육아하는 직원에 대한 비난이나 동정이 묻어나는 걸까. 그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육아하는 직원1의 입장에서는 후자에 가깝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아이의 상황을 가장 염려하는 건 부모고,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가장 고민한 것도 부모다. 아주 비상식적 부모가 아니고서야 자립자존의 능력이 없는 애를 혼자 둘리 없기 때문이다.
비경험의 언어란 이런 거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에 대해
내가 경험한 상황, 내가 경험한 사람, 내가 경험해온 삶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며 이야기 하는 것.
혹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삶에 대해 '무지와 무관심의 태도'로 이야기 하는 것.
그렇다면 듣는 이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네가 어떤 일에 반응해버리면,
네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이 너를 지배해.
네가 너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거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中)
빅터 프랭클 박사가 한 말에 따르면, 반응해서는 안 된다.
즉, 감정적으로 소리 지르거나 날을 세우는 즉각적 반응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 인간이 그런가. 앞서 말했듯 인간은 이성을 관장하는 대뇌피질만 있는 게 아니고 감정의 변연계, 본능의 뇌간도 있다. 보통 위의 같은 경우 내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 나는 반응했고(후회가 길진 않았다) 어떤 경우 나는 깜빡 하고(?) 반응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이 후회의 여운은 좀 더 길게 남는다)
두 가지 경우 다 '반응'의 영역에 서있었다.
나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기에.
내가 '대응'하고자 하면 어떤 언어를 쓸 수 있을까? 중요한 건 비경험으로 인한 무지나 무관심에서 나온 말을 한 사람에게 나 역시 어떤 말을 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평생 그들 언어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육아휴직 후 복직한 여성 직원에게) " 잘 쉬다 왔어요?"
"어휴, 잘 쉬다오다니요~잘 모르시겠지만, 육아근로에 비하면 회사근로는 쉬운 편입니다"
(구정 전날 오후 3시경 사무실에서)"오늘 구정 전날인데, 여자직원들은 준비할 것도 많을 테니. 빨리빨리들 퇴근해요!"
"조기 퇴근이라니, 좋습니다. 그런데, 요새 누가 성별 가려서 일을 해요~ 따님한테 그리 말씀하시면 큰일 나요“
(애가 아픈데) "애는 누가 키워요?"
"제가 키웁니다. 아이 병원 갔다가 출근하고, 아이 방학시간 고려해서 근무시간 조정도 하고. 다~제가 합니다"
뒤늦게 이렇게 말을 할 걸 그랬나 후회하며 대응의 언어를 적어봤다. 물론 이게 정답은 아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비경험의 언어로 본인을 가해자로도, 누군가를 피해자로도 만들지 않기를.
육아하는 직장인은 비단 성별로 구별 지을 수 없고, 이들은 모두 위대한 여정을 항해하는 자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