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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억하는 독서법[11]

오래 머물면 그 기억도 짙어집니다.

by 빛방울

끄적끄적 낙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시간을 붙잡아두는 것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빨리 해치우고 싶은 조급한 마음과 서둘러 일을 처리하려는 마음이 큽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후다닥 얼른 읽고 한 권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땐 성취욕이 컸던 모양입니다.


나 이만큼 읽었어. 이렇게 책을 좋아해.

으스대고 싶었던 걸까요?


어느 순간부터 책을 여기저기 흩어두고 천천히 오래오래 읽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맡에는 짧은 토막글이 모인 에세이, 책상엔 호흡이 긴 책이나 어려운 책들, 학교 책상 위에는 그림책이나 동화책, 청소년 소설책들이 그러니 한 권을 다 읽어버리는 일이 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집중해서 책 읽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핑계이긴 합니다만. 휴대폰으로 넷플릭스를 트는 시간,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SNS 하는 시간들, 책을 옆에 두고 잠시 켠 휴대폰을 열었다가 책 한 권 못 읽고 끝나버린 밤시간도 솔직히 많았습니다.


책을 오래 두고 읽기 시작한 건 책모임에서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는 시간이 생기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혼자서 읽으면 스치고 지나갈 머릿속의 생각을 잠시 잡아서 끄적이고 적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공감하거나 궁금한 부분에 밑줄을 긋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천천히 읽으며 책 속을 노니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책에 줄을 긋거나 끄적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책은 깨끗이 보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왠지 나의 끄적거림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던 것 같습니다. 내가 밑줄 그은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내가 책에 남긴 기록들이 다른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왠지 낯부끄럽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습니다.


책 모임을 시작하면서 발제문을 통해 나도 알지 못했던 내 안에 있던 비밀문을 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꺼내지는 비밀스러운 조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흩어져있던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그 깊이는 더해지고 생각에 꼬리를 물고 자연스럽게 들어가 보게 되는 내면에 닿게 되었습니다.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문장 사이에 빠져서 잠시 머물었다가 나와야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기에 언제가 휘리릭 잊혀지겠지만 그래도 깊이 나누고 오래 머물렀던 책은 더 오래오래 남아있다가 내 안에 저장이 되거나 희미해지는 듯합니다. 책에서 얻은 것들을 내 삶 속에서 적용하면 그 책은 내가 되어있기도 하니 책을 기억한다기보다 체득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또 다른 방법은 독서 다꾸입니다. 독서 다꾸를 하려면 일단 책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다 읽으면 그 책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콘셉트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 속의 강렬한 장면이나 메시지를 담은 키워드를 잡아냅니다. 빈 공간에 책과 다른 또 다른 나만의 방이 생기는데 그 안에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하나씩 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인물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읽으면서 생각한 것, 궁금한 것, 깨닫게 된 것, 감동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독서 다꾸를 보면서 책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시간을 소환하기도 합니다.


소중한 지난 추억이 담긴 사진첩을 펼쳐 더듬더듬 그날을 떠올리듯 책을 읽고 쓴 독서 다꾸를 펼치며 새로운 책을 읽듯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손으로 기록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요리조리 오리거나 찢어서 붙이던 촉각들이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잘못된 스티커를 조심조심 떼어 붙이고, 샤라락 거리는 종이를 찢는 소리와 다른 질감의 종이 위에 펜으로 쓰는 느낌들도요. 다 만들고 나면 가끔은 그 책을 쓴 작가님에게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작가님의 책을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눠보시겠어요? 하면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방법으로든 기록을 하면 그냥 읽고 책을 덮었을 때보다 훨씬 더 기억할 수 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쓴 방법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들이 하고 계실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알고 계신 이야기를 이리도 길게 끄적거려서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애쓰셨어요. 감사합니다.


화창한 가을이어야 하는 요즘, 내내 비가 와서 아쉽고 속상합니다. 비가 오는 주말이지만 따뜻한 차와 책 한 권 읽으시면서 좋은 시간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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