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황석희 Jan 05. 2020

자막은 글이 아니라 말이다.

영화 자막과 맞춤법

자막에 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막을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말소리를 음성 기호로 전사한 것을 글이라고 하진 않는다. 자막은 캐릭터의 대사를 그대로 전사(transcribing)한 것에 불과하다. 요새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의 한국 컨텐츠에 올라가는 한국어 캡션 자막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거기서는 영화, 드라마, 예능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어 자막으로 올리고 그 컨텐츠를 해외에서 서비스할 때는 그 자막을 해당 언어로 번역해 올린다. 이렇게 애초에 영화 자막의 출발점은 등장인물의 말소리다. 영화 번역가의 머릿속에선 브래드 피트들과 케이트 블란쳇들이 이미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린 그 한국어를 받아 적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저렇게 썼지만 사실 저렇게 듣자마자 완벽한 한국어로 받아 적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은 번역의 신이 아니고서야 존재할 수가 없다. 영어로 들리는 대사의 뜻을 파악한 후 그것을 한국어 대화라고 생각하고 우리말로 다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보통 이 과정을 번역이라고 부른다. 쉽게 번역이라고 하면 될 것을 이리 빙빙 돌려가며 하는 이유는 등장인물의 말을 형태를 갖춘 글로 옮긴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번역 행위와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영화 번역은 등장인물의 대사를 다른 언어로 전사하는 행위다. 이처럼 영화 자막은 글이 아니라 말이라고 봐야 타당함에도 글의 잣대로 평가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번역가에게 가장 번거롭고 방해가 되는 것은 맞춤법이다. 


최근 번역한 작품의 번역 평을 보다가 “~구만”을 지적하는 글을 봤다. “~구먼”으로 써야 맞다는 것이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번역가가 맞춤법을 모르거나 영화사에서 감수도 안 한 것 같다고 했다. 물론 그 번역가는 맞춤법을 알고 있고 그 영화사도 몇 명이서 감수를 한다. 나는 자막에서 굳이 노인의 말투를 써야 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구먼”을 쓰지 않는다. 나는 영상 컨텐츠는 물론이고 일상에서도 “~구먼”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김태리들과 박보검들이 영화에서 “날씨 좋구만”이라고 했다고 어문 규정도 모르는 배우라며 지적을 당하는 일은 없다. 일상에서도 옆 사람이 “점심 먹어야겠구먼”, “오늘 날씨 좋구먼”이라고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나?


“~구먼“이 표준어가 된 것은 표준어 규정 제10항 “모음이 단순화된 형태를 표준어로 삼는다”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먼”이 “~구만”에 비해 널리 쓰이므로 “~구먼”을 표준어로 삼는다고도 했다. ㅕ 모음 단순화는 납득한다고 해도 현재 뭐가 더 널리 쓰이는지는 국립국어원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어문 규정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한다. 가령 몇 년 전만 해도 “~길래”는 맞춤법에 틀린 표현이었고 “~기에”를 써야 했다. “오다가 붕어빵 팔길래 한 봉지 사 왔어.”라고 쓸 수 없고 “오다가 붕어빵 팔기에 한 봉지 사 왔어.”라고 써야 했다는 거다. 당시엔 나도 케이블 TV 컨텐츠만 번역할 때라 자막의 맞춤법을 칼 같이 지켜야 했다. 케이블 TV 컨텐츠(미드, 버라이어티, 다큐 등)의 자막은 개봉관 자막에 비해 맞춤법, 띄어쓰기 규정이 까다로워서 거의 사전 수준으로 써서 납품해야 한다. 내가 그 짓을 6년이나 했다니 생각해 보면 소름이 돋는다. 번역 회사에서 맞춤법, 띄어쓰기를 얼마나 신경 쓰냐면 번역을 잘하지만 맞춤법, 띄어쓰기에 약한 번역가보다 번역은 좀 못해도 맞춤법, 띄어쓰기가 강한 번역가를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번역 회사의 클라이언트가 지적하는 것은 평가가 어려운 번역의 질보다 당장 평가가 쉬운 어문 규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실력이 떨어져도 어문 규정을 잘 지키는 번역가와 일하는 게 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이런 이유로 당시에 “~길래”는 쓸 수 없었고 그렇다고 “~기에”로 쓰자니 어색해서 그것도 쓸 수 없었다. 내 번역관으로는 자막이 글이 아니라 말인데 내가 쓰는 말에 “~기에”는 좀처럼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훨씬 집착이 심했지만 지금도 입 밖으로 뱉어서 어색한 자막은 최대한 기피한다.) 결국은 그 유명한 "짜장면"이 표준어로 인정된 2011년 8월에 “~길래”도 함께 표준어로 인정되기 전까진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표현을 눈앞에 두고서 굳이 굳이 다른 표현을 찾아 빙 둘러가야 했다. “학교 가기에 이른 나이다”를 “학교 가길래 이른 나이다”로 쓰는 것은 잘못이라는 87년 국어사전의 용례를 이제야 바로잡은 것이다. 이렇게 명백히 틀린 것도 수십 년이 지나 수정될 정도니 조만간에 "실제 사용 빈도를 고려하여 비표준적이더라도 그 빈도가 높은 경우 표제어로 삼았다."라는 문구로 “~구만”이 인정되는 것은 딱히 기대할 일도 아니다.


이렇게 누구나 일상 구어에서 그렇게 사용하고 있으나 맞춤법에 어긋난다 하여 자막에 쓰기 꺼려지는 예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더 들자면 “~바라(wish)”가 있다. 구어에선 “~바라”라고 하지 않고 “~바래”라고 한다. 굳이 “~바라”로 쓰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바래”에 비하면 없다시피 한 수준이다. 근래 가수 아이유의 “밤편지”에서 “~바라”를 사용한 예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상 구어는 물론 노랫말에서도 늘 “~바래”를 써 왔다. 글에선 “~바라”일지 모르겠지만 말에선 “~바래”라는 얘기다. 드라마에서 연인에게 “네가 행복하길 바라”라고 말하는 걸 들어본 적 있나?


나도 지금껏 자막에서 “~바라”를 써 본 적이 없다.(생각해 보니 있긴 하다. 클라이언트가 굳이 그런 피드백을 주면 굽히지 못할 때도 있었다.) 등장인물은 살아있는 말을 하는데 자막에서 멈춰 있는 글로 옮겨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어가 아닌 말을 자막에 적으면 자막을 읽으면서 흐름이 턱턱 막힌다. “~바라”를 쓰지 않은 건 번역가로서의 오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바라”라는 표현이 들어가야 하는 문장이면 아예 다른 표현을 선택해 버린다. “~바라”를 쓰지 않으면 또 번역가가 맞춤법을 모른다며 지적을 당하기 때문이다. 눈 딱 감고 “~바라”로 쓰면 누구에게도 지적받지 않고 속은 편하겠지만 그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자막이 아닐뿐더러 내 번역관과도 동떨어진 자막이다. 그깟 지적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당할 수 있지만 내 오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의 눈에 한두 번씩 툭툭 불편하게 걸리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요즘은 “네가 행복하길 바라”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면 “네가 행복했으면 해”, “네가 행복하길 빌어” 정도로 굳이 돌려쓴다. “네가 행복하길 바래”라는 정답을 코앞에 두고 왜 빙 둘러 마음에 들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은 표현을 써야 하는지. 이게 무슨 비효율적인 낭비인지 모르겠다.


비슷한 예로 혹시 “나 숙제해야 돼”가 아니라 “숙제해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있나? 그 차이가 궁금하면 지금 한번씩 소리 내어 읽어 보자. 후자를 써 본 적 있나? “해야 돼”는 맞춤법상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국립국어원에선 “해야 해”를 권장한다. 말이 권장이지 맞춤법을 칼 같이 써야 하는 곳에선 “~돼”를 쓰면 으레 수정하라는 요청이 온다. 가급적 피동 표현을 피하자는 의도인데 사용 빈도를 봤을 때 이것도 참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피동, 수동 등 소위 번역투나 띄어쓰기에 관해서도 할 말이 정말 많지만 주제를 분리해 써야 할 정도로 쌓인 게 많아서 참는 게 좋겠다.


시적 허용이라는 용어가 있다. 문법상 틀린 표현이라도 시적인 효과나 운율을 위해 허용하는 것인데 나는 자막에도 이런 예외가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칭하자면 “구어적 허용”이다. “~구만”, “~바래”, “해야 돼” 이렇게 겨우 세 가지 예를 들었을 뿐이지만 구어적 허용이 필요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예들은 “되다”와 “돼다”, “낳다”와 “낫다”를 착각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엄격한 어문 규정의 엄격한 잣대는 엄격하게 댈 곳에 엄격하게 사용하면 된다. 어문 규정의 목적이 한국어의 비효율적인 사용과 쓰임의 위축은 아닐 것이다. 저런 구어적 허용이 어문 규정에 반영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있다 해도 내가 늙어 죽을 때쯤이나 두어 개 반영될 것 같지만, 적어도 관객들이라도 글에 댈 잣대를 자막에 대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나는 “참 답답하구먼, 이거 꼭 바뀌어야 해, 제발 좀 바꿔 주길 바라.” 같은 자막은 쓰고 싶지 않다.


자막은 글이 아니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브스 아웃 - 뻔하기에 뻔하지 않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