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을 직면하다
글을 쓰고 나서 충만감을 느껴본 적이 드물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나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지고 태어난 능력들은 대부분 언어와 맞닿아있다. 고로 나는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책을 읽고, 써야 할 것 같아서 글을 쓴다. 내 능력이 퇴화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의무감에 가깝다. 말했듯 나는 나를 잘 아니까. 누군가는 글을 오랜 시간을 들여 기획하고 체계적으로 쓴다는데, 나의 글은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을 마구 갈겨 쓰는 글일 뿐이라 이렇다할 발전이 없다.
그런 내가 글을 쓰며 자그마한 충만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면 바로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나의 고통을 글에 쏟아낼 때다.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활자화되어 어딘가에 기록될 때, 생각은 놀랍도록 명료해지고 단순해진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람인 것만 같고, 나의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울 때.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글에 쏟아내다 보면 내 상황이 보인다. 잠시나마 타자화된 나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볼 수 있다.
최근 누구보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내게 소중한 기회를 통째로 날릴 뻔한 일이 있었다. 슬픈 영화를 봐도 웬만해선 울지 않는 내가 속이 너무나도 상해 온종일 목놓아 울었다. 그 와중에도 일상은 계속돼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르바이트를 가고, 정해진 일정을 소화했다. 가는 버스 안에서 울컥울컥 눈물이 차올라도 버스에서 내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웃었다. 두 얼굴의 삶이었다. 돌아서기만 하면 금세 세상이 미워져서 신은 죽었다며, 니체가 옳았다며 독기 가득한 생각을 했다.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무서워졌던 날, 집에 돌아와 글을 썼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글을. 글을 두서없이 써 내려가면서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으며,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 무섭다고 피하지 않고 내 상황을 직면하는 것. 내 상황을 제대로 볼 줄 알기 위해서는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므로 글을 쓴다. 글을 쓰다 보면 다양한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하니까. 결국, 나 같은 사람은 어딘가에라도 쏟아내야 한다. 말로 하든, 글로 쓰든. 어떻게든 배설해야 정리가 된다. 그 복잡한 생각들을 머릿속에만 두고 감내하다가는 언제 곪아 터질지 모른다.
빠르게 회복하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나는 고통을 토해내는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