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I 이후의 분배와 권력
AGI 이후의 경제를 논할 때 가장 흔히 등장하는 장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낙관적 풍요의 서사입니다. 기계가 대부분의 일을 대신해 주고, 사람들은 더 적게 일하거나 아예 일하지 않으며, 교육과 의료와 창작이 거의 공짜에 가깝게 제공되는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비관적 붕괴의 서사입니다. 임금이 사라지고 소비가 무너지고 부가 극단적으로 집중되며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세계입니다. 두 서사는 모두 가능하지만, 둘 다 문제를 단순화합니다. 실제 세계는 단일한 결말이 아니라 다수의 경로를 갖고 있고, 그 경로는 제도와 소유 구조, 경쟁 정책, 국제질서, 사회적 신뢰 같은 변수에 의해 달라집니다. 따라서 AGI 이후 경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서사가 아니라 모델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모델은 단지 수식으로 된 거시경제 모델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복잡계로서 사회를 다루는 도구, 즉 에이전트 기반 모델과 시뮬레이션을 포함합니다.
전통 경제학은 종종 대표 개인이나 대표 기업 같은 단순화된 가정을 사용합니다. 이 접근은 평균적 경향을 설명하는 데 강점이 있지만, AGI처럼 구조를 바꾸는 충격을 다룰 때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왜냐하면 AGI 이후의 경제는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환의 시대에는 이질성이 중요합니다. 어떤 기업은 AGI를 빨리 도입해 생산성을 크게 올리고, 어떤 기업은 자본 부족이나 규제 때문에 도입이 늦어집니다. 어떤 가계는 자본과 기술 접근권을 통해 소득이 증가하고, 어떤 가계는 임금 감소로 소비가 위축됩니다. 어떤 국가는 전력과 반도체 공급망을 바탕으로 지능 인프라를 구축하고, 어떤 국가는 사용자의 위치에 머뭅니다. 이런 차이가 상호작용하며 전체 시스템을 만들어냅니다. 이 상호작용은 단순한 평균으로는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해지는 것이 에이전트 기반 모델입니다.
에이전트 기반 모델은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들을 개별 에이전트로 두고, 각 에이전트가 특정 규칙에 따라 행동하면서 전체 시스템이 어떤 패턴을 만들어내는지 관찰하는 방식입니다. 가계는 소득이 줄면 소비를 줄이고, 소비를 줄이면 기업 매출이 줄며, 매출이 줄면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줄이고, 고용이 줄면 다시 가계 소득이 줄어드는 연쇄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경기순환의 이야기지만, AGI 시대에는 이 연쇄가 새로운 변수와 결합합니다. 기업은 고용을 줄이면서도 AGI 도입으로 생산을 유지하거나 늘릴 수 있고, 가격을 낮춰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더 빨리 도태됩니다. 동시에 정부가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소비가 유지되며 기업의 매출 감소가 완화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부가 재정 여력이 없거나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을 늦추면, 수요 붕괴가 더 심화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책, 기업 전략, 가계 행동의 상호작용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시뮬레이션은 바로 이 상호작용을 실험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시뮬레이션이 특히 강력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AGI 이후 경제는 과거 데이터만으로 학습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정책 실험이 현실에서는 너무 위험하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가 갑자기 대규모 기본소득을 도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혹은 로봇세를 도입했을 때 기업 투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또는 특정 기업의 지능 인프라 독점을 강하게 규제했을 때 혁신이 위축되는지 경쟁이 촉진되는지 같은 질문은 실제로 실험하기 어렵습니다. 시뮬레이션은 완벽한 답을 주지 않지만, 최소한 질문을 구조화하고, 조건을 바꾸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즉 민감도를 보여줍니다. 이것만으로도 정책 논쟁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말로만 싸우는 대신, 어떤 가정이 어떤 결론을 낳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AGI 이후 경제 시뮬레이션에서 어떤 요소를 넣어야 할까요. 저는 다섯 가지를 핵심 블록으로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생산 블록입니다. 기업이 노동과 자본, 그리고 지능 인프라를 어떻게 결합해 생산하는지 정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능 인프라는 단순한 생산성 계수의 증가가 아니라, 노동 대체와 비용 구조의 변화로 반영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산업에서는 AGI 도입이 고정비를 크게 올리고 변동비를 줄이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데이터센터 투자와 전력 계약이 고정비가 되고, 인건비는 줄어듭니다. 이 변화는 가격 전략과 경쟁 구조를 바꿉니다. 둘째는 분배 블록입니다. 기업 이윤이 배당과 재투자, 임금 지급으로 어떻게 나뉘는지, 그리고 자산 소유가 가계 소득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델링해야 합니다. 자본소득의 집중이 강할수록 불평등이 커집니다. 셋째는 소비 블록입니다. 가계는 소득과 기대, 불확실성에 따라 소비를 결정합니다. 임금이 불안정하면 예비적 저축이 늘고 소비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넷째는 정부 블록입니다. 정부는 세금을 걷고 지출하며, 규제를 통해 시장구조를 바꾸고, 사회 안전망을 설계합니다. 여기서 기본소득, 공공 서비스 확대, 기업 과세, 독점 규제 같은 정책 변수들을 실험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인프라 블록입니다. 전력과 컴퓨팅의 제약을 모델에 포함해야 합니다. 많은 모델이 기술을 무한히 확장 가능하다고 가정하지만, AGI 시대의 병목은 물리적입니다. 전력망이 포화되면 기업은 원하는 만큼 확장하지 못합니다. 반도체 공급망이 막히면 학습과 운영 규모가 제한됩니다. 이 제약은 경제 성장률과 불평등, 지역 격차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이 다섯 가지 블록을 갖춘 시뮬레이션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질문은 임금 없는 세상에서 수요가 유지되는 조건입니다. 기본소득이 어느 수준이어야 소비가 붕괴하지 않는가. 기본소득을 재정으로 조달할 때 기업 투자와 성장률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두 번째 질문은 부의 집중을 완화하는 정책 조합입니다. 독점 규제를 강화하면 가격은 내려가지만 혁신이 느려지는가. 공공 지능 인프라 투자는 민간 투자를 대체하는가, 아니면 촉진하는가. 세 번째 질문은 전환 속도와 사회 안정성의 관계입니다. AGI 도입이 빠를수록 생산성은 빨리 오르지만 실업과 불평등이 더 크게 발생하는가. 전환 속도를 조절하는 정책은 가능한가. 네 번째 질문은 국제 경쟁입니다. 한 국가가 전력과 반도체에 투자해 지능 인프라를 먼저 구축하면, 다른 국가는 기술을 수입하는 사용자 국가로 남는가. 블록화가 발생하면 성장과 불평등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다섯 번째 질문은 신뢰와 정보 생태계입니다. 가짜 정보가 늘어날 때 사회적 불신이 소비와 투자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정치적 양극화가 정책의 일관성을 약화시키면 경제가 더 불안정해지는가. 이 질문들은 현실에서 동시에 얽혀 있지만, 시뮬레이션은 요소를 분리해 원인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뮬레이션을 예언 도구로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뮬레이션은 미래를 맞히는 기계가 아니라, 가정과 결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어떤 모델이 어떤 결론을 내는지 보면, 그 결론은 모델의 가정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의 핵심은 정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주장도, 기본소득이 경제를 붕괴시킨다는 주장도 각각 특정한 가정에 의존합니다. 세율이 어떻게 변하는지, 기업이 투자와 배당을 어떻게 조정하는지, 가계가 소득 불확실성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전력과 컴퓨팅 제약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시뮬레이션은 이 가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토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정책 논쟁에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시뮬레이션 자체도 정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델이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제외하는지는 가치 판단을 반영합니다. 불평등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 모델은 평균 성장률만 극대화하는 결론을 낼 수 있고, 사회 안정성을 중요하게 보는 모델은 성장률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분배를 강화하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AGI 이후 경제 시뮬레이션은 단순한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의 도구가 됩니다.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모델의 구조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서 시뮬레이션은 기술적 작업인 동시에 사회적 합의의 도구입니다.
AGI 이후 경제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새롭고,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서 직관과 서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이유는 미래를 맞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가계, 기업, 정부, 인프라가 어떤 규칙으로 상호작용할 때 풍요가 확산되는지, 어떤 조건에서 불평등이 폭발하는지, 어떤 정책 조합이 사회 안정성을 높이는지 실험해야 합니다. 에이전트 기반 모델은 이 실험의 가장 유용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미래는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시뮬레이션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면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주고, 그 선택의 비용과 리스크를 사전에 점검하게 해줍니다. AGI 시대의 경제학은 숫자를 예측하는 학문이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하는 학문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