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한 편이 스크린을 넘어 보여주는 것, 중국판 넷플릭스들의 경쟁
Chapter 01
어느 주말 밤, 무심코 넷플릭스를 열었다가 알고리즘이 권한 중국 드라마를 틀었다. 난홍(难哄, The First Frost). 32부작이라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1화부터 여주인공이 이유 모를 냉담함을 장착하고 나와서 잠깐 참을까 말까 고민했다. 중국 로맨스 드라마 특유의 고구마 구간(설명이 부족한 채 끌어가는 답답한 초반부)이 3화까지 이어지는데, 이걸 넘기자 화면이 달라졌다.
배경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야경, 모노레일, 습한 공기가 느껴지는 골목길. 드라마 속 지명은 난우(南屋)지만, 실제 촬영지는 충칭(重庆)이다. 사실 이 도시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졌다면, 그건 아마 《투투장부주(兔兔长不主)》 덕분일 것이다. 난홍과 같은 세계관에 속하는, 같은 작가의 전작. 난홍의 배경 도시 '난우'는 이 작가가 창조한 가상 도시이고, 두 드라마는 모두 그 세계 안에 산다.
드라마 자체도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시청하는 내내 다른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누가 돈을 댔고, 누가 만들었고, 왜 넷플릭스에까지 올라왔는가. 한 편의 드라마 뒤에 펼쳐진 산업 구조를 들여다보면, 중국 콘텐츠 전쟁의 풍경이 보인다.
Chapter 02
난홍의 탄생 지도를 그려보면 이렇다.
� 난홍(难哄) 제작 개요
✍️원작: 죽이(竹已) 작가의 동명 웹소설. 중국 대표 웹소설 플랫폼 진강문학성(晋江文学城)에 연재. 주로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하는 로맨스 장르 작가.
�감독: 구우녕(柯汶利). 대만 출신. 《악작극지문》, 《친애적 열애적》 연출.
�주연: 백경정(白敬亭) · 장약남(章若楠). 중국 내 로맨스 드라마에서 손꼽히는 조합.
�플랫폼: 알리바바 산하 유쿠(优酷, Youku) 독점 방영(2025.2.18) → 넷플릭스 글로벌 출시(2025.3.4)
�제작사: Wajijiwa(哇唧唧哇) · 유쿠 정보기술(북경) · 후난 갤럭시 쿨 엔터테인먼트 문화미디어
�촬영지: 충칭(重庆). 2024년 2월~6월 촬영. 극중 지명은 가상 도시 '난우(南屋)'.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대만 감독을 기용했다는 것이다. 중국 자본, 중국 배우, 중국 웹소설 원작인데 연출자는 대만 출신. 이건 단순한 인재 선발이 아니다. 중국 OTT들이 대만·홍콩 연출자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건, 본토 드라마의 문법적 경직성 — 때로 과하게 도식적이고 때로 규제의 그늘 아래 지나치게 순한 — 을 극복하기 위한 의식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구우녕 감독 특유의 조금 더 섬세한 감정선과 영상 문법이 이 드라마에 스며들어 있다는 평이 있다.
"중국 자본 + 대만 연출 + 중국 웹소설 IP
= 글로벌 OTT 판권 판매"
이것이 유쿠가 선택한 방정식이었다.
그리고 넷플릭스 판권 판매. 유쿠가 자체 플랫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글로벌 공룡에게 판권을 판 것은, 도달 범위(reach)에 대한 현실적 판단이다. 넷플릭스 없이는 한국 시청자의 알고리즘에 오르기 어렵다. 실제로 난홍은 2025년 2월 27일 넷플릭스 글로벌 일일차트 TOP 6에 오르고, 한국에서도 공개 당시 TOP 10에 진입했다. 넷플릭스라는 배급망 없이는 이 숫자가 나올 수 없었다.
죽이 작가의 소설은 단발성이 아니다. 그는 '난우(南屋)'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세계관을 구축해왔다. 드라마화된 것만 해도 세 편이다.《투투장부주》(2023), 《난홍》(2025), 그리고 《절월량》(2026 예정) 까지. 이 중 난홍은 투투장부주의 스핀오프이기도 하다. 투투장부주를 본 시청자라면 상옌이라는 캐릭터를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난홍에 더 쉽게 진입할 수 있다.
이건 마블 유니버스식 IP 확장 전략이다. 히트작의 세계관 위에 또 다른 이야기를 얹고, 기존 팬덤을 자동으로 신작의 잠재 시청자로 변환한다. 중국 웹소설 플랫폼과 OTT가 함께 이 구조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난홍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IP 비즈니스의 표본이다.
Chapter 03
난홍을 만든 유쿠를 이해하려면, 중국 OTT 생태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넷플릭스·왓챠·웨이브가 경쟁하듯, 중국에는 자국산 플랫폼들의 치열한 전선이 있다. 그리고 그 전선은 단순한 OTT 경쟁이 아니라, 중국 빅테크 거인들의 패권 전쟁이기도 하다.
중국 OTT는 흔히 '빅3'(유쿠·아이치이·텐센트 비디오)로 분류되고, 여기에 빌리빌리와 망고 TV를 더해 5강 체제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각각 BAT(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라는 중국 빅테크 삼각편대의 산하에 있어, OTT 경쟁이 곧 IT 공룡들의 대리전이기도 하다.
유쿠는 세 플랫폼 중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아이치이는 오리지널 콘텐츠로 브랜드를 각인했고, 텐센트 비디오는 막강한 가입자 기반과 IP를 보유하고 있다. 유쿠는 한때 유튜브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지만, 이제는 콘텐츠 유통에 집중하며 포지셔닝을 재정립 중이다.
이 맥락에서 난홍의 제작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유쿠는 단순히 콘텐츠를 사서 유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 원작은 진강문학성에서 이미 검증된 IP, 감독은 대만에서 데려왔고, 주연 배우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로맨스 조합을 골랐다. 그리고 결과물을 넷플릭스에 판권 판매했다. 이건 콘텐츠로 차별화하되 글로벌 수익화 경로까지 확보한, 비교적 정교한 전략이다.
와지지와(Wajijiwa, 哇唧唧哇)는 어떤 회사인가?
난홍의 제작사 중 하나인 와지지와(哇唧唧哇)는 2017년 설립된 독립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텐센트 비디오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창조영 101》 등을 공동 제작하며 텐센트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창업자 룽단니(龙丹妮)가 텐센트 비디오 출신이라는 점에서 텐센트 생태계와 연결고리가 있지만, 텐센트의 공식 자회사는 아니다.
즉, 난홍은 알리바바 계열 유쿠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인데, 제작사 중 하나는 텐센트와 관계가 깊은 와지지와다. 콘텐츠 산업에서 경쟁사들이 한 작품의 제작에 함께 참여하는 이 구조가, 중국 OTT 생태계의 복잡성을 상징한다.
결국 난홍 한 편에 알리바바의 자금, 텐센트 생태계와 연결된 제작사, 후난 방송 계열의 미디어 역량, 대만 감독의 연출력이 모였다. 플랫폼 경쟁을 하는 기업들이 콘텐츠 단위에서는 연합하는 현상 — 이것이 중국 콘텐츠 산업의 합종연횡이다.
Chapter 04
난홍을 논하면서 빌리빌리를 빼놓을 수 없다. 빌리빌리는 난홍의 방영 플랫폼은 아니었지만, 중국 콘텐츠 생태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창이다.
빌리빌리의 핵심은 탄막(弹幕, Danmu)이다. 탄막은 시청자가 입력한 댓글이 영상 화면 위를 가로질러 흐르는 인터랙션 방식이다. 한국 유튜브의 댓글창이 화면 밖에 따로 있다면, 빌리빌리에서는 그 댓글이 화면 위를 날아다닌다. 드라마의 감동적인 장면에서 수백 개의 "OMG" "이 장면…" 이 동시에 흘러가는 풍경 — 이건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집단적 시청 경험의 형태다. 혼자 보는데 함께 보는 느낌.
이 문화는 중국 젊은 세대의 콘텐츠 소비 방식을 상징한다. 서브컬처·애니메이션에서 시작해, 이제는 드라마·스포츠·교육 콘텐츠까지 탄막이 확산됐다. 빌리빌리가 단순한 동영상 플랫폼을 넘어 Z세대 문화 허브로 자리잡은 이유다.
아이치이는 오리지널 드라마를, 텐센트 비디오는 규모를, 빌리빌리는 커뮤니티와 문화를 강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유쿠는? 지금 난홍 같은 작품으로 "검증된 IP + 글로벌 인재 + 해외 판권"이라는 새 루트를 개척 중이다.
Chapter 05
난홍의 출발점은 웹소설이었다. 그렇다면 웹소설 시장은 전 세계에서 어떤 지형을 이루고 있을까. 수치와 구조 모두에서 흥미로운 대비가 있다.
2023년 기준 중국 웹소설 시장 규모는 약 55조 원(3,000억 위안)으로 세계 최대다. 등록 작가 수만 2,405만 명, 독자 수는 5억 3,700만 명을 넘어섰다. 14억 인구에서 가능한 숫자다. 2024년 기준 웹소설 독자는 2억 8,000만 명 이상이 정기적으로 읽고 있으며, 열독률은 24.3%에 달한다.
중국 웹소설의 핵심 플랫폼은 진강문학성(晋江文学城)과 웨원그룹(阅文集团, China Literature) 산하의 기점중문망(起点中文网) 등이다. 특히 웨원그룹은 텐센트가 최대주주로, 웹소설 IP를 드라마·영화·게임·애니메이션으로 체계적으로 확장하는 수직 계열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죽이 작가의 연재 플랫폼 진강문학성은 특히 여성향 로맨스 장르에 강하다.
중국 웹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미디어 믹스의 속도다. 인기작이 드라마,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웹툰, 심지어 굿즈로 동시다발적으로 확장된다. 난홍 역시 원작 소설 외에 웹툰(중국 내 제목 《Eternal Love》)이 있고, 한국에서는 네이버 시리즈에 《주체할 수 없는》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시됐다. 소설→웹툰→드라마→해외 OTT 판권의 흐름이 하나의 패키지처럼 작동한다.
한국 웹소설 시장은 중국의 수십 분의 일 규모이지만, 성장 속도와 산업 구조의 정교함에서 독보적이다. 2022년 약 1조 390억 원에서 시작해 2025년에는 약 2조 원 규모로 성장한 것으로 추산된다. 2013년 100억 원에서 시작해 12년 만에 200배 이상 성장한 궤적이다.
한국 웹소설의 강점은 유료 연재 모델이다. 중국과 함께, 사실상 전 세계에서 웹소설 유료 연재 모델이 정착된 나라는 한국과 중국 두 곳뿐이다.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리디가 시장의 90% 가량을 과점하는 구조이며, 2024년 기준 네이버 약 41%로 1위다. 한국 웹소설의 글로벌 수출도 활발해, 2024년 로맨스판타지 웹소설 《상수리나무 아래》 단행본이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7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웹소설이 웹툰으로, 웹툰이 드라마·영화로 이어지는 IP 파이프라인 역시 한국이 체계적으로 운영한다. 네이버 웹툰의 글로벌 플랫폼 확장, 카카오픽코마의 일본 진출이 그 연장선이다.
미국은 전통 출판 강국이지만, 웹소설이라는 형식으로의 전환은 느렸다. 초기에는 Wattpad 같은 팬픽션 플랫폼이 주류였다가, 이제 조금씩 유료 모델이 확산되는 중이다. 중국 웨원그룹의 Webnovel, 네이버의 영어권 플랫폼 등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유료화 흐름을 가져오고 있지만, 미국 시장의 디지털 독서 문화는 전통 e북(아마존 킨들)이 여전히 강력하다. 웹소설과 e북의 경계가 흐릿한 미국 시장은, 구독 기반 웹소설보다는 원샷 구매 방식에 더 익숙하다.
일본은 만화(망가)와 라이트노벨이라는 강력한 기존 포맷이 웹소설 시장의 본격적인 형성을 지연시켰다. 나루토 작가가 포스팅을 하고, 팬들이 소설을 쓰고, 그것이 다시 상업 라이트노벨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웹소설 플랫폼 '소설가가 되자(小説家になろう)'가 대표적이지만, 유료 구독 모델로의 전환은 2024년 카쿠요무(カクヨム)가 도전하면서 이제 시작 단계다. 한국 카카오의 일본 법인 픽코마가 일본에서 유료 웹소설·웹툰 모델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유럽은 전통 출판의 역사가 강하고, 언어가 분산되어 있어 단일 웹소설 시장이 형성되기 어렵다. Wattpad가 영국·독일에서 일부 인기를 끌고 있으나, 유료화된 웹소설 생태계는 아직 초기 단계다. 오히려 한국·중국의 웹소설 IP가 번역되어 유럽 시장에 역수입되는 형태로 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웹소설 시장 규모 비교 (추정, 2023~2024년 기준)
* 미국·일본·유럽은 공식 통계 없어 업계 추정치 기반. 중국·한국은 공개 자료 기반.
이 지형에서 한국의 위치가 흥미롭다. 시장 규모로는 중국의 3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유료 연재 모델의 고도화, IP 파이프라인 구축, 글로벌 수출 경쟁력에서는 중국과 함께 세계 웹소설 시장을 선도하는 두 나라 중 하나다. 그리고 중국이 난홍으로 유쿠-넷플릭스 판권 루트를 개척했다면, 한국은 네이버-카카오를 통한 웹툰·웹소설 글로벌화로 맞서고 있다.
Chapter 06
난홍을 다 보고 나면, 충칭이 궁금해진다. 화면 속 모노레일과 야경이 있는 그 도시를. 드라마의 '난우'는 가상이지만 충칭은 실제로 존재하고, 죽이 작가가 그 도시를 배경으로 3편의 이야기를 써낸 것은 단순한 배경 선택 이상의 애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시청자의 화면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산업적 지형이 펼쳐져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진강문학성에서 연재된 소설이 유쿠의 전략 기획으로 드라마화되고, 대만 감독의 연출을 거쳐, 텐센트와 연결된 제작사의 역량이 더해지고, 알리바바-넷플릭스 판권 계약을 통해 전 세계 190개국 시청자에게 도달하는 이 흐름.
플랫폼은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 아니다. 플랫폼은 전장이고, 콘텐츠는 그 전장에서 싸우는 병기다. 중국의 OTT들이 서로 합종연횡하며 더 좋은 IP를, 더 유능한 감독을, 더 넓은 판권 시장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다.
난홍의 초반 3화가 답답하더라도 버텨보시길. 충칭의 야경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야경 너머로 보이는 중국 콘텐츠 산업의 풍경도.
"콘텐츠는 드라마가 아니라 전략이다."
난홍 하나를 파고들었더니 중국 빅테크의 OTT 전쟁, 웹소설 IP 경제, 넷플릭스의 글로벌 유통 독점력이 모두 보였다. 드라마를 보는 것은 언제나 그 드라마가 만들어진 세계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참고 / 팩트 메모
· 난홍은 죽이(竹已) 작가의 '난우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투투장부주의 스핀오프다. 세 번째 작품은 절월량.
· 와지지와(哇唧唧哇)는 텐센트 자회사가 아닌, 텐센트와 협력 관계가 깊은 독립 엔터테인먼트사다. 창업자 룽단니가 텐센트 비디오 출신이며, 텐센트 비디오 프로그램을 다수 공동 제작함.
· 제작사는 Wajijiwa · 유쿠 정보기술(북경) · 후난 갤럭시 쿨 엔터테인먼트 문화미디어 3곳이다.
· 중국 웹소설 시장 규모(55조 원)는 나무위키·블로그 인용 수치로 2023년 기준 추정치다. 공식 통계 기관의 단일 집계치가 아님.
· 한국 웹소설 시장(2025년 약 2조 원 전망)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대한출판문화협회 자료 기반 추산.
· 촬영지 충칭(重庆)은 실제 도시이며, 드라마 내 지명 '난우'는 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