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건넨 노란불
인생의 마흔 해를 맞은 온달은 ‘불혹’의 나이에 이르렀다. 공자님은 마흔이 되면 세상의 이치와 삶의 원리를 깨닫는다고 했지만, 온달에게 마흔은 그저 숫자일 뿐이었다. 삶은 여전히 미궁 속이었고, 그는 그 미궁 한가운데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덮친 ‘산촌유학’ 다큐는 심장을 휘저어 놓았을 뿐, 뚜렷한 단초가 되지 못했다. 산촌유학원 누군가처럼 내려놓을 것도 없었고, 새롭게 시작할 것도, 갈 곳도 없었다. 그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한 채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맥아리 빠진 나날은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온달이 마흔 살이 되던 어느 봄날 토요일. 주 5일제 덕분에 이제 토요일은 온전히 쉬는 날이 되었고, 전날을 불태운 그는 늦은 아침으로 속을 달래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스마트폰도 유튜브도 없는 그의 손에는 오직 리모컨뿐. 배불뚝이 TV만 괴롭히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때 평강이 청소기를 밀다 다가왔다. 소리 없이 리모컨을 낚아채더니 조용히 물었다.
“오빠, 요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나이 쉰이 넘어 육십에 가까워도 여전히 “오빠”라 불리는 온달. 그러나 그 시절의 그는, 뭔 일이 너무 없어 힘들었다.
“오빠, 회사 재미없어요?”
평강의 가벼운 물음 속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직장이 재미로 다니는 곳은 아닐 터. 하지만 정말로 재미있게 해본 일이 있었던가. 그 시절 온달은 그저 버티며 살아내고 있었다. 공허한 눈빛만이 그의 대답이었다.
“오빠, 회사 그만두고 싶어요?”
단 한 번도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즈음 온달은 매일같이 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제가 오빠 마음 다 알아요. 오빠, 다른 일 해보면 어때요?”
되도 않을 말 같아 흘려버렸지만, 평강의 목소리에는 묘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오빠, 어젯밤에 다 들었어요. 그렇게 힘들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금요일 밤,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온 온달은 거실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꼬대가 시작됐다. 처음엔 옹알이처럼 흐느적대던 말은 곧 분노와 절규로 번졌다.
“힘들어… 회사 그만두고 싶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
평강은 그 곁을 지키며 귀엣말로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누가 힘들게 해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 물음마다 온달은 성실히 대답했다. 그렇게 속내를 모두 털어놓았다.
“오빠, 제가 밤새 생각해 봤는데 이제 다른 일을 해보면 좋겠어요. 그래서 준비했어요. 이거예요.”
평강이 턱 밑으로 내민 것은 낡은 업무용 다이어리 한 권. 표지 하단에는 ‘대한건설협회’, 상단에는 ‘2008’이라 적혀 있었다. 이미 철지난 다이어리였다.
“이게 뭔디?”
온달의 물음에 평강은 말없이 웃으며 속삭였다.
“꿈 노트예요.”
드림 노트도 아니고, 꿈 공책도 아니고. 얼핏 우스꽝스러운 이름 같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묘하게 호기심이 일었다.
온달은 노트를 펼쳤다. 첫 장에는 분명한 글씨체로 ‘1000억 수주 달성’이라 적혀 있었고, 다음 장에는 점점 흐려지는 글씨가 이어졌다. 그마저도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한 채 텅 빈 여백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 적어봐요. 오빠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되고 싶은 모습. 그냥 생각이나 말만 하지 말고 적어보자구요. 글로 안 되면 그림을 그려도 돼요. 오빠가 예전에 부러워했던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그런 분들 만나서 물어봐도 되고요.”
“아니, 뭔 소리여. 내가 직장 관두면 돈은 누가 벌어?”
관둘 수 없다는 생각만 앞서는 온달에게 평강은 단호하게 답했다.
“누가 당장 그만두래요. 준비하라는 거지요. 웬만하면 백 살까지 살아야 한다면서요. 아직 반도 안 살았잖아요. 지금이 딱 좋은 때예요.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이제 제가 벌면 돼요. 적게 벌면 적게 쓰면 되잖아요. 오빠는 잘할 수 있어요. 전 그거 믿어요.”
작정한 말을 다 했는지, 평강은 이불과 리모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나들이를 나가며, 온달을 홀로 남겨두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온달은 소파 위에서 꿈 노트를 뒤적였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생각 하나 고쳐먹지 못했다. 또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두 눈을 감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날 평강의 말은 온달을 곧장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달랐다.
온달에게 처음으로 “잘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믿음을 전해준 이가 바로 평강이었다.
공자는 마흔에 미혹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 온달은 평강의 한마디에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흔들림이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빨간불에도, 파란불에도 멈추지 못하고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온달. 그에게 아내는 처음으로 “잠시 멈추라”는 노란불을 켜보였다. 어쩌면 그 멈춤 속에서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날 처음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