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
*스포일러 포함
혁명은 실패한다. 인종주의적 극우도 실패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착되어 있다.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히피와 반문화 운동 등이 지나간 후를 이야기했다면, 이를 느슨하게 원작으로 삼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이념적 혁명이 실패한 이후를 담아낸다. 물론 여기서의 혁명이 대대적인 민중의 연대를 통한 것이었다기보단, 무력 투쟁을 전개하던 ‘프렌치 75’라는 한 단체에 머무는 것이었지만. 흥미롭게도 PTA는 프렌치 75의 주요 멤버로 뮤지션들을 캐스팅했다. 리더인 퍼피디아는 테야나 테일러를, 그의 배신으로 영화 초반부 숙청당하는 이들은 알라나 하임이나 정글푸시 등이었고, 살아남은 구세대 혁명가들 또한 알앤비 뮤지션 디종(Dijon)이나 영화음악가 폴 그림스타드 등의 뮤지션이다. 다만 영화 초반부 묘사되는 이들의 행적에서 ‘문화’나 ‘예술’과 관련된 활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인랜드]의 혁명조직 ‘24fps’가 영화 집단이었던 것의 오마주 이상은 아니다. 이들의 실패, 나아가 리더인 퍼피디아가 이민자 단속을 수행하고 인종청소를 꿈꾸는 록조 대령(숀 펜)과 불륜 관계로 이어져 실패하고 만다는 지점은 얼핏 지금의 ‘음악’이 놓인 지점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여담이지만 이 지점은 모 흑인 여성 래퍼가 백인 인셀 남성 중심의 극우 채팅방에서 활동했다는 루머를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니까 음악이, 패잔병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마약에 취한 채 TV로 보던 <알제리 전투>와 같은 신세라는 것이다. 본작의 음악을 맡은 조니 그린우드가 여전히 강경한 시오니스트라는 것 또한….
영화의 전반부는 아무래도 도입의 기능만을 수행한다. 퍼피디아가 록조와 결탁하며 팻(밥 퍼거슨의 이전 이름)과 딸을 두고 떠난 뒤 프렌치 75 멤버들이 하나하나 숙청되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해 ‘박탄 크로스’라는 가상의 지역에서 살아가는 16년 뒤 부녀의 이야기로 넘어가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 그러니까 이 영화를 어떻게 마케팅할지 몰라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직 혁명가 디카프리오의 이야기”로 풀어낸 예고편의 내러티브로 넘어간다. 사실 이 내러티브는 영화의 메인 플롯이라고 보기 어렵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PTA의 다른 영화, 이를테면 <매그놀리아>나 <리코리쉬 피자> 같은 군상극에 가깝다. 밥과 윌라(체이스 인피니티) 부녀 투톱의 영화가 아니라, (아마도 2000년대 중후반일) 프렌치 75의 활동 시기와 그로부터 16년 후인 현재 시점을 두고 펼쳐지는 군상극에 가깝다. 혹은 오히려 퍼피디아와 록조 사이의 이야기에 가깝달까. 현재 시점으로 이행된 이후 퍼피디아는 더 이상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는 윌라 등 뒤에 유령처럼 계속 존재한다. 이 영화는 리더의 변절로 실패한 이념투쟁이라는 하나의 유령과, 그 변절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자 한 인종청소의 실행자가 다시 대면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목격되는 것은, 이민자들의 ‘생추어리’에 가까운 박탄 크로스의 풍경이다.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것은 밥의 행적이지만, 그 행적에 동행하게 되는 것은 가라테 도장 사범 세르히오의 탈출계획이다. 윌라가 자신의 딸이라 의심하게 된 록조는 군을 동원한 대대적인 이민자 단속을 핑계로 밥 부녀를 찾으려 하고, 세르히오와 그의 가족, 동료들은 이러한 상황에 앞서 대비해 둔 계획을 실행한다. 약과 술에 절어 과거의 암호코드를 잊어버리고, 그의 전화상대인 프렌치 75의 신입 구성원은 “혁명이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군요”라는 말만 반복한다. 물론 물 흐르듯 흘러가는, (흥미롭게도 베니시오 델 토로의 육체를 따라 웨스 앤더슨의 근작들을 떠올리게끔 하는) 세르히오의 계획과 암호문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밥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것이 프렌치 75가 전개했던 이념투쟁의 무용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센세’ 세르히오는 ‘선배’ 혁명가 밥을 조력하고 예를 갖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프렌치 75의 작전은 록조의 이민자 관리국을 무력화하고 수용된 이민자들을 탈출시키는 것 아니었나. 차이가 있다면, 프렌치 75의 다소 비인도적인 탈출 방식(수용된 이민자가 다 탈 수 없는 트럭의 크기와 같은)과 달리 세르히오는 모두의 탈출을 중심에 둔다는 점이다. 오프닝 시퀀스의 작전 마지막에서 팻이 폭죽과 함께 별의 별 혁명 구호를 외치던 것과 달리, 세르히오의 작전에는 그러한 열광적인 구호나 환호가 부재하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웨스 앤더슨스러웠던, 세르히오가 복도의 탈출로 문을 닫자 카펫이 스르륵 깔리는 장면에서 "Viva la revolución!"이라 외치는 밥 퍼거슨을 떠올려보자. 프렌치 75의 실패한 혁명은 이념(idea)을 남겼고 세르히오의 계획은 아이디어로서 그것을 계승한다.
흥미로운 것은 퍼피디아와 록조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들 속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갑작스레 계획을 실행한 세르히오만이 아니다. 애초에 퍼피디아는 왜 프렌치 75 동료들을 배신하고 록조와 결탁했는가. 영화는 두 사람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퍼피디아를 보고 발기하는 록조와, 그의 발기를 부추기는 퍼피디아를 보여준다. 프렌치 75의 혁명은 퍼피디아의 ‘꼴림’으로 실패했고, 백인 우월주의자 유력가들의 비밀 그룹 ‘크리스마스 모험가’에 합류하고자 했던 록조의 계획 또한 그의 흑인 여자 페티쉬로 인해 실패한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실패뿐 아니라 죽음의 위협까지 가져올 수 있을 페티쉬로 엮임을 알고 있었을테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랑이라기보단) 각자의 꼴림을 실행에 옮긴다. <팬텀 스레드>의 우드콕과 알마가 죽음의 페티쉬를 나누었던 것처럼. 다만 퍼피디아와 록조의 페티쉬는, 각자뿐 아니라 각자의 진영에 치명타를 날릴 무언가에 가깝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전체는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뒤처리라고 할 수도 있다. 퍼피디아는 가정에 구속되지 않기 위해 변절했고, 록조는 자신의 페티쉬를 무마하고자 ‘크리스마스 모험가’ 구성원이 소유한 너겟 공장에서 노동하던 이민자들을 잡아들였다. 두 사람에게 (혁명과 인종청소라는) 이념은 있으나 그것의 작동에 관한 이해는 없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그려내는 무수한 아이러니들, 이 영화의 코미디를 구성하는 모든 순간은 여기서 초래된다.
그리하여 밥 퍼거슨은 대체 어떤 인간인가? 실패한 혁명가이자 폭탄 전문가였으며 술과 약에 취해 꼭 기억해야 할 암구호도 잊어버린 채 <알제리 전투>를 돌려보는 사람. 프렌치 75의 첫 작전 묘사에서 그는 퍼피디아에게 작전을 물어보지만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 신호에 맞춰 (폭탄이 아니라) 폭죽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는 작전에 참여했다는 쾌감과 퍼피디아에 관한 애정 외에 감지되는 것이 없다. 영화는 프렌치 75의 구성원이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그들의 전사를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다소 멍청하게 얼빠진 듯한 디카프리오의 새파란 눈동자를 보며,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어쩌면 실제로 그러할 수도 있다. 그는 퍼피디아의 연인이자 윌라/샬린의 (실제적) 아버지이지만, 퍼피디아의 변절과 록조의 숙청으로부터 탈출할 때 다른 조직원의 도움을 받기만 할 뿐이다. 물론 윌라의 실종 이후에도 마찬가지. 보통의 영화라면 카체이싱의 장소로 채택하지 않을, 기묘한 파도같은 도로에서의 카체이싱 이후 윌라와 재회했을 때, 그가 마주한 윌라는 자신에 의해 구출된 대상이 아니라 퍼피디아-록조가 초래한 난장판 속에서 자립한 주체다. 그들이 만든 전투의 결과물 중 하나인 윌라는 그 다음 전투에 참전하는 누군가가 된다. 밥은, 비록 그가 혁명가로 대우받으면서도 어떤 혁명을 하고자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다음 전투가 도래할 것이라 망상, 아니 상상하는 누군가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