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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3. 202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 2001

*영화비평쓰기 모임을 통해 써본 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오랜만에 다시 보며, 생각보다 코미디 세트가 많은 영화임을 깨달았다. 가령 어느 사무실에서 두 남성이 대화하다가, 한 남성이 다른 이를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살로 위장하는 장면이 그렇다. 손수건으로 총에 묻은 자신의 지문을 지우고 시신의 손에 총을 쥐여주다가 실수로 총이 발사되고, 옆 방에 있던 여성의 엉덩이에 가격되는 장면, 그리고 “뭔가 내 엉덩이를 물었어!”라고 외치는 여성. 밀실처럼 느껴지던 사무실과 소음기 달린 권총의 조합은 완벽한 살인계획을 가능케 하는 듯했으나, 벽에 난 총알자국과 함께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은 화면 너머의 공간이 존재함을 단박에 알려줌과 동시에 단발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살인자가 목격자가 된 여성 또한 처리하기 위해 그를 사무실로 끌고 오다가 복도 끝에 있는 청소부를 마주치는 장면은 또 한 번의 확장이다. 이를테면 살인마와 시체가 있는 사무실과 여성이 있던 옆방을 이어주는 공간의 발견이랄까? 이 장면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구조를 은근슬쩍 폭로한다. 애초에 이 장면은, 영화의 다른 수많은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더군다나 이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살인을 자살로 위장하려다 실수를 연발하는 멍청한 살인자의 이름조차 모른 채 이 장면을 본다. 관객이 이 장면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이 장면에서의 공간들이 다소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조립된다는 점뿐이다.


 사실 이 장면이 드러내는 방법론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윙키스’ 장면에서 먼저 드러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윙키스’ 장면 또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름은커녕 어떤 인물들인지조차 알 수 없는 두 남성의 대화로 구성된다. 선셋 대로에 위치한 식당 윙키스에서 한 남성은 자신이 꿈에서 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묘사하는 꿈은 곧바로 관객이 관람하는 영화의 장면이 된다. 그는 꿈 속에서 건물 밖 골목 귀퉁이에서 끔찍한 외양의 남자를 봤다고 말하고, 장면의 마지막 즈음 그 남자를 본 뒤 쓰러진다. 두 사람이 대화할 때 윙키스 밖의 공간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바깥은 환한 빛으로 가득하지만, 막상 두 사람이 식당을 나서자 꿈을 묘사하던 남자의 말처럼 낮도 밤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의 빛과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앞서 언급한 장면과는 달리, 이 장면에선 공간 밖의 리액션(여성의 비명)이 아닌 남자가 이야기하는 꿈 이야기를 통해 공간이 확장된다는 점이다. 즉 남자가 말한 이야기는 이야기 이후 이어지는 공간들(여기엔 카메라 구도가 포함된다)에 의해 확장되며 조립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등장하는 보랏빛 배경 속에서 춤추는 커플들의 이미지처럼 이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 이미지의 연속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커플들의 춤 위로 등장하는 하얀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지만 아직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베티와 리타의 얼굴이 등장하는 것은,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맞춰지지 않는 퍼즐들의 집합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어쩌면 그 퍼즐조각들의 구성조차 영화를 본 관객마다 다른 것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필름 누아르’는 꽤나 보편적인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퍼즐조각일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며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두 영화 모두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실제 도로명을 제목으로 삼으며, 어떤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이 할리우드 배우의 집에 몰래 숨어들며 시작되고, 영화의 제목 대신 도로명 표지판이 등장한다. 게다가 <멀홀랜드 드라이브>엔 선셋 대로의 도로명 표지판이 직접 등장한다. 데이빗 린치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트윈 픽스>와 같은 TV 시리즈로 준비하던 중에 촬영한 ‘윙키스’ 장면에서, ‘윙키스 선셋 대로점’이라는 간판이 클로즈업으로 담기기도 한다.


 물론 두 영화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언급한 김에 두 영화를 조금만 더 비교해보자. <선셋 대로>의 주인공 조는 자동차를 타고 빚쟁이들에게서 도망치던 중 무성영화 시기의 스타 노마 데스몬드의 집에 도착한다. 하지만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주인공은 자동차를 탄 채로 도착하지 못한다. 그 또한 누군가의 계략에 휘말린 듯한 상황 속에서 도망치지만, 그는 영화의 제목이 제시하는 도로 밖으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다면 왜 그는 선셋 대로로 도망치는가? 단순히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위치한 할리우드힐즈의 밑에 선셋 대로가 위치한다는 실제의 지리적 이유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두 도로 사이의 거리는 자동차 사고를 겪은 이가 밤새 걷는다 해도 도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데이빗 린치는 두 도로를 밤거리를 걷는 여자의 모습을 담은 몇 쇼트를 통해 연결한다. 그가 선셋 대로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여자는 자신이 도착한 집에서 영화 <길다>의 포스터를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리타’로 명명한다. 그는 이제 할리우드 황금기의 필름 누아르 걸작들을 자신의 껍데기로 삼는 존재가 된다. 


 린치의 전작들을 고려했을 때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필름 누아르의 흔적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굳이 영화에서 직접 언급되는 <선셋 대로>나 <길다>를 언급하지 않아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로스트 하이웨이>나 <엘리펀트 맨>처럼 필름 누아르의 잔향이 짙게 베어 있는 영화들부터, 극장판을 포함한 시리즈 전체가 필름 누아르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껍데기 사이를 부유하고 있는 <트윈 픽스>가 이미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할리우드라는 환상(들)내지는 꿈(들)과 현실(들)을 마구잡이로 뒤섞는 <인랜드 엠파이어>나, 범죄를 일종의 환상의 영역으로 놓고 그것을 지하실로 대표되는 표면 아래의 공간에 위치시켜 현실과 분리하는 <블루벨벳>과 같은 작품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린치의 영화들은 어쩌다 보니 휘말린 이들이 현실(들)과 꿈(들)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필름 누아르를 껍데기로만 끌어올 뿐, 그 장르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가 구축하는 것은 실제의 지리적 감각을 무시한 채 여러 공간들로 구획된 환상(들)과 현실(들)을 하나의 영화 속에 조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립은 그 조각들이 꼭 들어맞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조각들이 한편의 영화라는 집합으로 묶이게 되었음을 지시할 뿐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이야기로 묶일 수 없는 조각난 장면들, 가령 <트윈 픽스>의 빨간방을 연상시키는 어떤 공간, 윙키스 장면, 카우보이의 등장, 보랏빛 배경 속에서 춤추는 오프닝 시퀀스 등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조각이 맞지 않는 퍼즐을 구성한다. 각 조각들은 서로의 작동방식을 지시할 뿐이다. 가령 앞서 언급한 윙키스 장면은 이후 베티와 리타가 같은 공간에서 다이앤이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윙키스 장면에서 남자가 언급한 꿈이 실제로 벌어진 것처럼 베티-다이앤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 물론 꿈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인과관계가 베티-다이앤의 전환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애초에 윙키스 장면 자체도 어떤 논리적 연관관계를 지닌 장면도 아니다. 필름 누아르 장르가 ‘추리’라는 컨셉을 바탕으로 영화에 나열된 사건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해나간다면, 린치의 영화는 사건들을 나열하기만 할 뿐이다. 인물들은 풀지 못할 퍼즐조각으로 영화 속을 헤맬 뿐이다.


 베티가 다이앤으로, 리타가 카밀라로 전환되는 분기점인 ‘실렌시오’ 공연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은 보이는 그대로 작동하는 세계가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이 구조를 환기한다. 밴드도 없고, 가수도 없는 이 공연에서 유일하게 있는 것은 소리뿐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배반]이 아무리 ‘파이프의 존재’의 없음을 주장해도 그 작품이 회화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실렌시오’ 공연은 아무리 소리내지 않음을 강조해도 결국 녹음된 소리가 흘러나오는 상태를 공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멀홀랜드 드라이브> 또한 명확한 이야기도, 확정된 인물도, 일관된 이미지도 없지만 결국 한 편의 영화로써 존재한다. 단지 기이함을 내뿜으며 확장될 뿐이다. <트윈 픽스>에는 ‘빨간 방’으로 불리는 공간이 등장한다. 그곳과 유사한 공간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도 등장한다. 빨간 커튼으로 둘러 쌓인, 유리벽으로 막혀 있으며 인터폰으로만 대화가 가능한 공간. 갑작스레 등장한 그 공간 한가운데 앉아있는 의문의 인물(<트윈 픽스>의 빨간 방에서 등장하는 이와 같은 배우인 마이클 J. 앤더슨이 연기한다)은 영화감독으로 하여금 “그 여자”를 캐스팅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배후의 존재가 캐스팅을 비롯한 영화 곳곳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는 할리우드 영화의 투자자일 수도, 배급사나 제작사의 임원일 수도, 정치인이나 범죄조직의 수장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 그의 존재를 해석하든 정답은 없다. 정답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면 그가 영화 안에 존재한다는 것뿐이며, 그의 존재는 갑작스레 등장한 빨간 방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유도한다. <트윈 픽스>에서 처음 빨간 방이 등장했을 때, 관객은 그것이 극 중 대사대로 “다른 공간(Another Place)”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데일 쿠퍼를 비롯한 인물들이 그곳에 방문할 때, 그것이 꿈이나 환상인지, 혹은 기이하게 뻗어나간 현실인지, 혹은 갑작스레 이세계로 이동해버린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단지 그 공간이 갑작스레 등장하며 영화가 지닌 현실과 환상의 레이어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만을 인지할 뿐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마찬가지다. 실수로 발생한 총격으로 인해 옆방의 존재가 드러나고, 밀실처럼 느껴지던 공간이 확장되는 것처럼, 이 영화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존재가 드러나는 인물과 공간으로 가득하다. 빨간 방, 영화제작의 배후에 있는 의문의 남성, 카우보이, 검댕을 뒤집어쓴 윙키스 뒷골목의 남자, 그 남자를 보고 쓰러진 남자의 꿈, 다이앤의 집…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에 해답은 없다. 어쩌면 미스터리조차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 존재하는 것은 그저 카메라 앞에 있었던 대상들뿐이다. 린치는 카메라의 가장 강력한 기능인 지표성을 놓고 <멀홀랜드 드라이드>에 등장한 것들은 어쨌든 카메라 앞에 있었던 것들이니, 그것을 무엇이든 좋으니 알아서 해석해보라는 것처럼 이미지들을 늘어 놓는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어떤 논리를 갖추지 않은 채 다양한 의미망을 통과하는 이미지들을 늘어놓고 그것을 영화라 명명하는 시도에 가깝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그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어둔 것처럼, 이미지들의 집합을 만들어 놓고 “이것은 영화다”라며 제목을 붙이는 것. 사실 그것은 단순히 잘 만든 코미디 세트의 집합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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