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내가 만난 100인
우리에게 추억이 생겼잖아!
시장 가득 Black Eyed Peas의 <Where is the love>가 에워싼 채 국지성호우가 이 도시를 주룩주룩 줄을 긋듯 스케치화 하고 있었다. 어제 나는 싱가포르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도착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남은 방이라고는 남, 여 혼숙인 도미토리뿐이었다. 내일이 되면 4인실로 옮길 수 있다고 하니 일단 오늘밤만 버텨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젯밤 분명 잠들 때까지만 해도 나 혼자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로 옆 이층 침대에 기다란 뭔가가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침대밖으로 삐져나온 하얀 두 다리는 마치 사다리처럼 뻗어있었고, 발바닥은 그대로 벽에 찍으면 찍힐 것 같은 깜장발바닥이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바깥 공용 화장실 가서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빵이 노릇노릇 토스트가 되는 동안 주변을 살폈다. 키가 큰 남자가 뚜벅뚜벅 내려와 물 한 컵을 받아 식탁옆 창가에 기대어 홀로 마시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그는 어제 하룻밤 나의 룸메이트 깜장발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부터 발까지 내려오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나의 그의 발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맨발이었다.
'저러니까 발바닥이 깜장발이지.'
그는 비 온 뒤 따스히 내리쬐는 햇살과 물 한 컵으로 아침을 때운 뒤 사라졌다. 그의 외모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오후에 다른 방으로 옮겨 갈 예정이기에 대충 이것, 저것 정리하는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바로 룸메이트 인 깜장발이었다.
"하이~ 굿모닝!"
"하이~ 굿모닝!"
짧은 인사 후 나는 짐을 정리하느라 바빴고, 그도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 나가 버렸다. 그리고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그가 다시 들어왔다. 문이 열릴 때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나의 눈빛과 수줍은 듯한 그의 눈이 마주쳤다. 크로스 백을 매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든 그는 벌써 외출할 준비를 마친 듯했다. 다시 들어온 그는 침대 위에서 지도를 챙겨 나갔다. 그리고 또 몇 분도 지나지 않아도 그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입모양이 더 수줍게 움직였다.
"쏘~리"
"아니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여긴 내 방도 아닌데... "
되려 내가 더 큰 소리로 말했고 , 그는 얇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너 오늘 떠나?"
"아니, 다른 방으로 옮겨."
"나 때문에?"
"아니, 여성전용 4인실로."
"아~"
"나는 오늘 새벽에 도착했거든. 리셉션에서 여기 여자애 한 명이 쓰고 있다고 하길래 엄청 조심조심 들어왔어. 그래서 씻지도 못하고 그냥 자버렸어."
"오~ 저런! 미안해!"
"아니, 아니야~! 내 이름은 조쉬아야. 영국에서 왔어. 넌?"
"난 기영. 한국에서 왔어. 북한 말고. "
"알아. 북한사람들은 여행을 못하잖아!"
여행을 하다 보면 대다수의 외국인들이 한국과 북한을 잘 구별 못하는데 그는 달랐다.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그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시장으로 향했다.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스케치가 연출되는 시장의 모습이었다. 북적북적한 시장을 가득 메운 < Black Eyed Peas >의 노래가 제법 이곳과 잘 어울렸다. 나는 이 틈 사이를 구석구석 돌아다녔고 그 찰나 또 한 줄기의 비가 또 쏟아졌다. 일제히 모든 사람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처마 끝으로 모여들었다. 이 조그마한 처마 아래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오밀조밀 모여있다고 생각하니 여행의 묘미가 한껏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틈에 삐죽 고개를 내미는 이가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나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낯선 이의 시선을 더 오래 즐기고 싶었으나 들킨 것 같아 나는 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 조쉬아, 어디가?"
"숙소. 넌?"
"나도."
그는 결국 틈을 비집고 내 옆으로 왔다.
"내가 비로 유명한 나라에서 살아봐서 아는데 이 비는 금방 그칠 비가 아니야."
나는 그의 농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믿음마저 실렸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까부터 계산을 좀 해봤거든. 우리가 세 개의 지붕만 통과하면 숙소로 갈 수 있어."
"세 개의 지붕?"
큰 사거리로 되어있는 이 길 한 복판에서 그는 친절히 설명을 이어갔다.
"먼저 이쪽 신호가 바뀌면 저쪽 지하도로 뛰어가는 거야. 지하도에서 또 다른 신호가 바뀌면 건너편 가게까지, 그리고 거기서 길 건너 처마 끝으로 뛰어가면 돼. 어때? 같이 해 볼래?"
"그래. 해 보자!"
"그럼 신호가 바뀌면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뛰기 시작하는 거야."
신호가 바뀌었다.
"하나. 둘. 셋"
우리는 지하도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지하도 아래에 도착한 우리는 마치 첫 번째 작전에 성공한 요원처럼 뿌듯해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신호가 바뀌었다.
" 하나. 둘. 셋"
"뻑!"
옆에 같이 뛰던 조쉬아가 보이질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신호대기로 정차한 트럭미러에 이마를 부딪힌 것이다. 키가 작았던 나는 트럭미러를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통과했지만 키가 컸던 그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트럭미러도 깨지지 않았고 조쉬아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조쉬아, 괜찮아?"
그는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손으로 얼굴만 감싼 채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깨는 작고, 반복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두려운 마음에 다시 물었다.
"조쉬아, 괜찮아??"
마침 고개를 든 그는 잇몸이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순간 난 그가 머리를 세게 부딪혀 정신을 놓은 게 아닌가 싶었다.
"기영, 정말 멋지지 않아?"
"뭐가?"
"내 이마를 봐! 너와 나의 추억이 생겼잖아!"
"응?"
"이건 상처라 아니라 우리들의 추억이야. 바로 이 도시에서."
그땐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그저 조쉬아가 머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거나, 내 앞에서 가져가야 할 그의 자존심을 챙긴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간 그는 부어오른 이마로 일약 스타가 되어버렸다. 리셉션직원이 그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조쉬아, 네 이마가 왜 그래?"
그때부터 그는 봇물 터지듯 그때의 일을 훈장처럼 떠들고 다녔다.
다음날 아침에도 조쉬아의 이마는 조금 더 부어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이이닝룸 소파 한가운데 앉아 여러 여행자들 사이에서 어제의 일에 대해 한껏 떠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굿모닝 기영, 쟤가 한국에서 온 기영이야."
그 옆에 있던 사람들도 마치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일제히 인사를 했다.
"하이. 기영, "
나는 뒤돌아 서서 그를 다시 보았다. 언듯 보기에 마치 그는 플래시를 이마에 붙인 광부 같기도 했고, 오늘날의 미니언즈 인형 같기도 했다. 그것 또한 제법 잘 어울리는 조쉬아였다.
같은 일을 겪은 자.
추억으로 가져간 자.
그대가 진정한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