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2.
아침 일찍 출근한 나는 노트북을 켜자마자 메일함부터 열었다. JS전자의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전, 기술팀장과 영업팀장과 함께 JS전자에 직접 찾아가 넵투와 넵포머의 제안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라서 메일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높았다. 처음 제안이 끝났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정말 잘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업팀장 이준혁은 긴장이 풀렸는지 회사로 돌아오는 길 내내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저 오늘 좀 잘한 거 같지 않으세요? 아마 그 고객사 사람들 지금쯤 계약서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그때의 농담 섞인 확신이 나에게도 기분 좋게 전해졌다. 서민우 팀장도 평소와 달리 크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회사에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기에 이번 제안은 간절했고,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기대감이 모두에게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객사로부터 어떠한 응답도 없었다. 예상했던 고객의 답변 날짜가 조금씩 지나가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아침마다 메일을 열 때의 기대감은 점점 불안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영업팀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이 팀장, 아직 JS전자에서 아직 연락 없어요?”
이준혁 팀장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살짝 긴장한 듯 몸을 일으켰다.
“아, 네. 아직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담당자에게 안부 문자를 보내 봤는데, 아직까지 답이 없습니다. 내부 논의가 좀 길어지는 거겠죠?”
그의 말을 듣자 마음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연락 오면 바로 알려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데도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혼자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제발. 지금 이 불안을 두려움이 삼키지 못하도록 나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누구라도 괜찮으니 갈망하고 싶었다. 혹시 우리가 지나치게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건 아닐까? 고객사는 사실 다른 회사와도 접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처음에는 작았던 불안이 점점 커지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작은 기다림들은 사장인 나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얼마 전 서 팀장의 자신감 넘치던 표정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무작정 개발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 팀장님, JS전자에서 기술적으로 뭔가 추가 문의 온 거 없었어요?”
서민우 팀장은 깜짝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사장님. 추가 문의는 없었습니다. 기술적으로 궁금한 부분은 그 자리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저희도 점점 긴장이 되긴 합니다.”
평소 냉정한 그조차도 긴장한 모습을 보이자 나는 더 불안해졌다. 그를 안심시키듯 말을 덧붙였다.
“맞아요, 충분히 잘 설명했죠. 그래도 만약 작은 질문이라도 문의할지 모르니 잘 준비해 둡시다.”
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초조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 사무실에 앉아, 고객사 담당 관리자의 전화번호를 여러 번 열어 봤지만,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괜히 재촉했다가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까 두려웠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흘러도 메일함은 여전히 조용했다. 무기력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일들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사장은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백번 이해를 하지만 내 마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작은 희망의 소식에도 크게 기뻐하고, 작은 문제 하나에도 깊은 우울감에 빠지는 나 자신이 한심하기조차 했다. 작은 일에도 크게 흔들리는 리더는 직원들에게 신뢰를 주기 어렵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감정의 기복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답답했다. ‘이제 정말 회사 구조조정을 준비해야 하나.’
“사장님, 커피 한잔하세요.”
기획팀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앞에 커피를 놓았다. 그는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팀장님.”
“너무 걱정 마세요. 고객사가 내부적으로 논의가 많다 보니 응답이 늦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기획팀장의 말을 들었지만 현실에서의 불안이 다시 내 마음을 두려움으로 뒤덮는 걸 막지는 못했다. 혼자 사무실에 남아 지난 기억들을 더듬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런 불안과 기다림이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회사 창업 후 5년째 되던 그 가을, 일기장에 적었던 말이 생각났다.
[조증과 우울증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듯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잡는 것이 참 어렵다. 나는 AI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감정을 숨기는 연기가 조금 더 능숙해졌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불안에 잠식되지 않으려 애썼다. 좋은 일들은 작더라도 자주 만들고, 나쁜 일은 가능한 작게 만드는 습관을 꾸준히 키워 왔지만, 이런 기다림과 초조함에 취약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메일함을 확인했다. 새로운 메일은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이런 감정과 계속 싸워 가며 사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 기다림이 주는 고통을 견디는 것도 사장으로서의 내 역할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답이 늦어질 뿐이지 실패한 건 아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 해도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래 왔듯이 말이다. 하지만 메일함을 닫고 나오는 손가락 끝의 무거운 떨림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오늘도 초조함 속에서 그저 버텨 내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메일함을 열기 전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긴 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