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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간의 고시 생활이 끝났다.

내 인생에두 번다시없을공부야 안녕(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2020년. 새해가 밝자마자 임용 공부를 시작했다. 교직 자격증을 받은 지 10년, 그리고 학교를 떠나온 지 3년 만이다. 학교가 싫어 도망쳐 나온 주제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라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굳게 먹은 마음과는 달리 20과목이 넘는 강의서를 보자마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고시공부라니.. 생각만 해도 꼬리뼈가 짜릿짜릿한 것이 앞길이 까마득히 느껴졌다.


10년 전 어렴풋하게나마 배웠(던 것 같기도 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교육학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교육이면 교육이지 거기다 철학, 과정, 공학, 평가, 행정 따위는 왜 갖다 붙인 건가 싶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전공이 심리학이라는 거였다. 교육학으로 의식을 잃어갈 때 즘이면 심리학으로 심폐소생을 하듯 버텼다. 수업 시간마다 배운 것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며 많은 것을 느꼈던 대학시절을 떠올리면서 과연 공부하는 동안 어떤 걸 깨닫고 어떤 내 모습을 보게 될지 기대감마저 생겼다.


첫 수업에서 성격심리에 대해 배웠다. Big5(OCEAN) 모델에 따라 분석한 나는 매우 외향성(E)이 높고 개방적인(O) 사람이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말이었으며, 감각적인 것을 추구해 항상 새로운 것 찾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강사는 '이러한 사람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과 잘 맞지 않으며 공무원 같은 일은 개인의 성향과 지극히 반대되는 일이다' 고 했다. 응...?  내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강사는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 경우 사람이 쉽게 우울해지거나 자신이 가진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덧붙였다.


임용 공부를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지긋지긋했던 공부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이어졌다.
팔자에 없는 고시생활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이후 나는 강사의 말이 전적으로 맞았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어거지로 껴입어 보려고 온 몸을 옷 안으로 구겨 넣는 기분이 이런 걸까. 유튜브 찍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할 때의 내가 '물이 올라 탱글탱글 색을 뿜어내는 생기 넘치는 오렌지' 같은 느낌이었다면,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물고 머리를 쥐어뜯는 나는 '시름시름 생기를 잃고 말라비틀어져가는 쭈글탱이 한라봉' 같은 느낌이었다.


하얀 스탠드 불빛 만이 책상 한을 비추고 있는, 정말 숨이 막힐 듯 조용한 독서실. 차갑고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그곳에 가만히 앉아있자면 마치 영안실에 있는 시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을 무렵 나는 이곳에서 1년을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사람 냄새와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그곳에서 나를 송장처럼 굳어져가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과감히 비싼 돈을 주고 끊은 개인 독서실 책상을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온기 어린 카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다. 단언컨대 계속 그 독서실 책상을 고수했다면 나는 산송장이 아닌 진짜 송장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게 아닌데.. 진짜 이건 아닌데..'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망치로 치는(치다 못해 두개골을 갈라 쪼갤듯한) 현타가 찾아올 때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싶어 졌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아득한 터널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 터널을 끝까지 걸어 나가는 것 밖에 없었다.

컴컴하고 숨막히는 독서실 대신 택했던 카페들
공부하며 깨달은 것과 느낀 것

1. 내 손목과 바꾼 것  

1차 시험을 준비하던 6개월은 그나마 견딜만했다. 오늘의 공부는 내일로 미루면 되었고, 나에게는 항상 희망 찬 내일이 있었으니까. 머리~ 어깨~ 무릎 ♪ 목~ 발목~ 팔목♬ 사고 이후 성한 곳 없이 약해진 몸 또한 공부를 살살해도 되는 좋은 구실 거리가 되어주었다. 그 덕에 스스로에게 가혹하기로 소문난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필기를 준비하는 반년 간은 나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사고로 손목이 바스라진 탓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필기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부를 하는 방법에 대해 공부했다. 다행히도 새롭게 터득한 공부법은 찰떡같이 내게 맞아 들어주었고, 그 덕에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만약 내 손목이 아작 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을 고수해온 공부방법을 바꾸지 않았으리라 확신하기에, 사고가 내 손목을 가져간 대가로 합격을 가져다줬다고 믿는다.


고로 어떤 일도 끝까지 가보기 전까지 그 의미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될 것 같다. 세상만사는 정말 새옹지마니까.


2. 자기 사람을 가진다는 것

2차 시험을 준비하던 2개월은 나의 멘탈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탈탈 털어먹기에 충분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터디를 하면서 나보다 5-6살 어린 동생들로부터 끊임없이 나의 부족한 점을 평가받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늘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두려워하는 나에게는 그 2달이 정말 지옥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건 나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못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분명 나는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능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내게는 '논리'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냉철하게 답을 서술해나가야 하는 구술면접에서 따뜻하게 감성적으로 풀어나가는 나의 이야기는 그저 뜬구름 잡는 헛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실제적인 사례를 들어서', '구질구질하지 않게', '중언부언하지 말고'... 매번 반복되는 피드백들은 가슴에 묵직하게 쌓여갔고, 뒤따라오는 좌절감과 수치심에 가뜩이나 쪼그라든 고시생은 하루가 다르게 위축되어갔다. 그리고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에게 바보! 멍청이! 돌대가리! 를 외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날이 반복되면서 안 그래도 떨어졌던 자존감은 지하 3000M 암반까지 곤두박질쳤다.


시험을 앞둔 어느 날, 땅굴을 파고 들어간 나를 지켜보던 동생 하나가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변태의 멱살을 잡고 육두문자와 함께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던 사람인데! 고작 면접 따위에 왜쫄아요!'라며 내게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칭찬에 목말라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래 맞아! 내가 누군데! 몇 백 명 앞에서도 침 한번 안 삼키고 무대를 씹어먹던 사람인데! 쫄지말자!'라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우습게도 그 주문은 통했고 나는 변태 잡던 대담함으로 당당하게 면접장에 나아갔다. 그리고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2차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건대 만일 그 당시 나를 잘 아는 이의 재치 있는 응원이 없었다면, 잔뜩 쭈그러든 고시생이 금세 지하생활을 청산하고 땅굴 밖으로 올라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를 알고,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이 큰 자산을 가진 것과 같다. 내 곁에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고로 나는 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다.


3. 돈을 버는 이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것이 필요했다. 체력, 절제력, 이해력, 암기력, 그리고 돈(과 돈. 그리고 돈...) 참 슬프게도 한낱 아프고 가난한 백수에 불과했던 내게는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을 무렵에 나라에서 가난한 백성을 위해 청년 구직 지원수당이라는 것(청년 디딤돌 카드라 한다)을 옛다 하고 던져주었다. 자그마치 매달 50만 원씩 그것도 6개월이나! 이 돈은 2년째 합산 수입 0원인 우리 부부에게 어마어마한 지원이었고 우리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감사한 마음으로 수당을 받았다.


20년 가까이를 가난한 학생 신분으로 살아왔던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돈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원 없이 보고 싶은 책을 사고, 꿈도 못 꿀 비싼 인강을 듣고, 필요한 학용품들과 면접용 정장까지 준비하면서 나 자신에게 아낌없이 투자했다. 내 평생에 이렇게 넉넉히 공부해 본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그 돈 덕분에, 징글징글하게 나를 괴롭혔던 돈걱정이 사라진 덕분에, 나는 인생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돈에 대한 걱정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고) 정말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마지막 지원금 사용 보고서를 제출하던 날. 이름 모를 담당자 앞으로 감사의 편지를 끄적였다. '저를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적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온 나는 한동안 글을 잇지 못하고 두 눈이 씨뻘게 진 채 한참이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보내는, 전해질 수 있을지 조차 알 수 없는 편지였지만 이렇게라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편지를 마무리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지원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알게 된다면, 나 또한 그에게 작게나마 꼭 도움이 되어주고 싶다고 말이다.


돈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절히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이가 필요로 할 때, 망설임 없이 도움을 주기 위해 버는 게 아닐까 싶다.


지난했던 고시생활을 마치며

나에게는 콧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다. 길을 걷거나 음식을 할 때 혹은 큰 힘이 들지 않는 소일거리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대곤 한다. 내가 콧노래를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시험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오후였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버릴 책들을 정리하다 지난 1년 간 흥얼거림을 잊은 채 보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 충격에 빠졌다. 무엇이 나에게서 흥을 앗아갔던 걸까?


돌아다니기를 좋아해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애에게 하루 종일 한 곳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것은 큰 곤욕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힘들거나 우울할 때마다 사람들을 만나 재잘대며 힘을 얻었기에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과의 연결감과 유대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나에게 모든 이들로부터의 자발적인 단절이 적잖이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래서 얼굴에서 웃음과 빛을 잃고, 삶이 주는 소소한 재미들을 잊다 못해, 매일같이 흥얼대던 콧노래 마저 잃어버렸었나 보다.

나의 친애하는 애용이, 진주, 누룽지, 대박이에게

종일 웃을 일이 없던 나를 웃게 만들고, 산 송장 같았던 나를 잠시나마 살아나게 만든 것은 동네 이곳저곳에 존재하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이었다. 매일 아침 독서실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길냥이들의 사료를 챙기고, 건너 건너 이웃집에 사는 강아지들에게 간식을 먹이는 것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자 하루 중 유일한 낙이었다. 나를 보면 도망치기 바쁘던 고양이가 조금씩 다가와서 내게 몸통을 비비적거리게 되는 기적을, 매섭게 짖어대던 멍멍이들이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기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매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똑같은 나날을 반복하는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게 그들의 존재는 늘 기대되고 설레이는 작은 이벤트였다. 볼품없이 쪼그라들어있던 나에게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환영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적잖이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합격 후 고시생활을 돌이켜 보았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부모님도 친구도 아닌 동네 멍냥이들이었다. 여전히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나를 기다려주는 고마운 나의 지지자들에게 합격의 영광을 바친다.

공부싫어병에 걸린 나를 돌보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

1년 간의 고시생활을 버텨낸 데에는 특히나 한 사람의 공이 크다. 매일 아침 나를 일으켜 밥을 먹이고, 손을 붙잡고 독서실에 데려가고, 종일 함께 공부하며 내 곁을 지켜준 한 사람.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울했다가, 울다가 웃다가, 좌절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나를 곁에서 어르고 달래어가며 말도 안 되는 생떼와 온갖 짜증을 다 받아내었다. (어우 징그러. 참 어지간히 징징댔다.)


나의 공부 메이트이자 밥 메이트, 그리고 룸메이트이자 소울 메이트가 되어준 그 사람 덕분에, 나는 혼자였으면 절대로 버틸 수 없었을 수험 생활을 견뎌내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마치 어린 딸을 키우듯 살뜰히 나를 챙기고 보살펴준 신랑이 있었기에 나는 공부를 때려치우고 백수로 돌아가는 대신 한걸음 한걸음 떼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와서 말하기 참 쑥스럽고 새삼스럽지만 이 자리를 빌려 그 사람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고생했어요. 나 만큼이나.

아니, 나 보다 더.


P.S - 1년 만에 글을 쓰는 감회

믿거나 말거나 지난 1년간 가장 간절히 하고 싶었던 것이 글쓰기와 책읽기였다. 읽어야 하는 책 말고 읽고 싶은 책을, 쥐어짜내야 하는 논술이 아닌 내 마음이 담긴 글을 한껏 씹고 뜯고 맛보고 싶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그간 못쓴 글을 와랄랄라 써보고, 그간 못 읽었던 책들이니 왕창창창 읽어볼 참이다. 그간 마음속에 그득그득 담아왔던 것들을 마음껏 쏟아내야지. 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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