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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소녀에서 할매가 되기까지

내 몸 사용 보고서 1

시험에 합격하고 학교에 출근 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업무를 익히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의 직장생활이라 바짝 긴장해서는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혼자 뼈를 갈아내며 일 했다. 아주 오랜만에 첫 월급을 타서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선물하며 기쁨을 누렸고, 일에 적응해가면서 성취감과 존재감도 느꼈다. 그러나 얻는 만큼 잃는 것들도 생겨났다.


매주 한 가지씩 야곰야곰 잃어갔다. 첫째 주에는 퇴근 후 저녁시간을 잃었고(집에 도착할 때 즈음 좀비 상태로 넋이 나가 있었다), 둘째 주에는 신랑과 자기 전 나누던 담소를 잃었으며, (대신 오랜 시간 괴롭히던 불면증이 완치되었다. 머리 대면 3초 컷), 셋째 주에는 손목을, 넷째 주에는 목을, 마지막 주에는 골반을 잃었다. 매일 아침 보건실에 들러 파스와 진통제를 받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이곳저곳 돌려가며 파스를 붙여보고, 하루 3알 진통제를 먹어가며 버텨보았지만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퇴근 후 병원에 들러 한 달 내내 재활치료를 받아보았지만 도통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당장 시술을 받아보길 권했지만 이제 고작 일한 지 한 달 된 신입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한 달치 약을 더 처방받아 나오며 조금 더 버텨보겠다고 했다.

 



3년 만에 시작한 직장생활, 2달 만에 시작된 환자생활

그러나 자다가 일어날 만큼 통증이 심해지면서 아침마다 퀭한 좀비 상태로 출근하는 날이 잦아졌다. 죙일 인상을 쓴 채로 아픈 곳을 주물러 대며 아이들에게 찌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자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고 나면 이곳은, 이 일들은,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 마냥 버티는 것이 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몇 년 전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용기를 내어 관리자를 찾아가 병가를 요청했다. 출근 1달 반 만에 병가라니, 다들 띠 용한 표정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어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가감 없이 내 몸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덧붙여 내가 살아야 아이들도 살릴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3주 간의 병가가 시작되었다.

 

병가 첫째 날 아침, 입원절차를 밟았다. 의사는 간단한 시술이라며 걱정 말라했지만 척추에 바늘을 꽂는 것은 몹시 걱정스러웠다. 지금에 와서 말하건대 그 시술은 의사에게는 간단한, 그러나 환자에게는 전혀 간단하지 않은 것이었다. 맨 정신으로 수술실 침대에 누워 척추 사이에 관을 꼽아 신경을 찔러대는 과정을 생생히 느끼는 것은 정말 인생에서 손꼽히게 끔찍하고, 아찔하고, 유쾌하지 않은 역대급의 경험이었다.


3일간의 짧은 병원생활을 마치고 어마 무시하게 시선을 강탈하는 경추 보조기를 찬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달 내 통장을 초토화시킬 병원비를 어서 청산하기 위해, 병원서류가 든 묵직한 봉투를 꺼내 들었다. 한 장 한 장 정리하여 보험금 청구하던 나는, 그 간 내가 청구해온 보험금의 내역들을 발견했다.


내 몸의 히스토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내역서에는 내가 올해로 아픈지 10년이 되었다고 적혀있었다.

시선강탈 쩌는 보조기, 누워서 볼 수 있는 티비, 대존노맛 병원밥
골목대장 말괄량이 소녀는 자라서..

꼬맹이 시절부터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골목대장이었다. 괴롭힘을 당한 여학생들이 나를 앞장세워 남학생들에게 찾아갔을 정도이니, 남자 못지않은 힘과 평균을 훌쩍 웃도는 벌크는 그때부터 남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학창 시절에도 여느 여자애들과 달리 체육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체육으로 전교 1등을 휩쓸었고, 오래 달리기와 제자리멀리뛰기로 선수 제안을 받을 만큼 스포츠맨이었다.


몸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수험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시험을 앞둔 어느 날 밤부터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하더니, 상체를 세우지 못할 만큼 허리 언저리가 아팠다. 둔하고 미련했던 나는 뭔가를 잘못 먹었겠거니 하며 소화제를 먹고 버텼고, 그렇게 시험을 치던 중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그게 인생 첫 입원이었다.


병명은 폐렴인데 학생들 사이에서는 결핵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유도 출처도 알 수 없는 소문이었지만, 병원생활 끝에 퇴원한 내 몰골은 가히 누구라도 결핵이라 믿을 만큼 상해있었다. 그때 처음 느꼈다. 병원이 멀쩡한 사람도 진짜 환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고작 일주일 간의 병원 생활은 나의 체력과 면역력을 앗아갔고, 건강한 스포츠맨이었던 나를 한 순간에 병자로 바꾸어 버렸다.


그 날 이후 나는 교내에서 인정하는 자타공인 약골이 되었다. 즐겨 마지않던 체육시간에 더 이상 날아다닐 수 없게 되었고, 수업시간을 빼고 보건실에 몸을 뉘이는 날이 늘어났다. 한번 터를 잡은 병은 제멋대로 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설쳐댔고, 나는 따라주지 않는 체력을 쥐어짜 내어 공부를 따라가느라 항상 허덕였다. 그렇게 10대 후반의 나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아련한 말괄량이가 되었다.


소싯적 동네를 주름잡던 소녀였다. 저것은 살아있는 토끼다.
20대에 할매가 되었습니다.

나의 20대는 술과 낭만이 아닌 약과 골골댐으로 가득 차있었다. 어디 한 곳 크게 아픈 거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으련만, 늘 소화불량, 두통, 복통, 감기 따위의 잔병들에 치여 살며 술집보다 병원을 더 자주 들락였다. 원인을 돌이켜보면 몸을 혹사시킨 탓이 컸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용돈을 벌기 위해 쉴 새 없이 알바를 했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날밤을 새어가며 공부에 매진해야 했으니까. 생명줄을 줄여서 가방끈을 늘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늘 시간이 부족한 탓에 분단위로 시계를 확인하며 종종걸음으로 이곳저곳을 오갔고, 급하게 끼니를 때우다 복 받히는 설움에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항상 조급하게 무언가에 쫓기며 생활고에 허덕이니 몸이 남아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때도 여전히 둔하고 미련했던 나는 이 약 저 약을 돌려가며 먹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오가며 어거지로 버텨냈다.


학과에서 총대로 일하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만 2번을 했다. 한 번은 체육대회에서 달리기를 하다 구급차에 실려갔고, 나머지 한 번은 축제 때 학과 주막에서 파전을 나르던 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의사는 과로로 몸에 무리가 간 것 같다고 했고, 덧붙여 영양실조 상태라고 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영양실조란 말인가. 그 당시 응급실에 따라온 학과 친구들도, 침대에 누워 설명을 듣는 나 스스로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진단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며 귀에 인이 박히게 들어온 말은 '몸은 좀 어때?', '아픈 데는 좀 괜찮아?', '오늘따라 아파 보인다' 등의 걱정을 동반한 안부인사들이었다. 그런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참 맘이 좋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할 수도, 안부를 묻는 이에게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아이러니랄까? 반복되는 괜찮냐는 질문을 받다 보면 '전혀 안 괜찮으니까 제발 괜찮냐는 질문 따위는 좀 그만 하시라'고 맞받아치고픈 마음이 욱하고 올라오기도 했다.


그들에게 나는 늘 몸이 안 좋은, 자주 혹은 항상 아픈 아이였기에 자연스레 나의 별명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내지 '전할매'로 이어졌다. 나의 찬란한 20대가 한낱 병신('병들의 신'을 줄인 말이니 오해 마시길..)으로 전락해버리다니.. 그것은 참으로 애통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평생 약해본 적 없던 말괄량이 소녀는, 쑥쑥 자라서 잔병치레를 달고 사는 골골쟁이 할매가 되었다.



본 이야기는 '내 몸 사용 보고서2 (보이지 않는 병과 싸운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duckyou-story/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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