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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민 Jul 29. 2024

해외 이민을 결심하게 된 이유

해외이민 도전에 특별한 자격이 있나요?

영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


2010년 9월, 영어에 ‘영’ 자도 모르고 워킹홀리데이 비자와 함께 호주로 무작정 출국을 했다. 어느새 1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고, 시간을 돌아보니 한국으로 돌아가기에는 끔찍한 영어실력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던 나는 1년 더 연장을 하며 호주에 2년 동안 머물게 되었고 결국 한국으로 2013년에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와서 영어를 잘했느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영어 전공자도 아니며 오히려 영어에 관심도 없던 그림 쟁이었다. 한국에서 살 때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한번 한 적이 없었고, 외국인을 보면 그냥 신기할 따름일 뿐, 외국과 나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런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는....

참 길다..


일단 호주에서 나는 생활영어와 일하면서 할 수 있는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 그야말로 전쟁터에 고스란히 뛰어들었고 살기 위해 악바리처럼 영어를 해왔다.

그렇기에 2년 후, 나의 영어실력은 전보다 조금 늘었을 뿐이지 말 그대로 잘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술교사에서 영어교사로 직업을 바꿨다. 무작정 영어유치원에 이력서를 돌렸다.

영어교사 경력이 없던 나는 면접영어를 따로 준비해서 면접을 보았고 그렇게 2013년부터 영어교사로 직업을 바꾸어 새 삶이 시작되었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영어교사로 근무하며 호주에서보다 오히려 더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영어는 점차 더 늘기 시작했고 그렇게 회화 영역을 늘려갔던 것 같다.

한마디로 듣는 귀가 트이자 스피킹을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캐나다 ece 면접을 보며 자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왜 호주가 아니라 캐나다였을까


요즘 들어 이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러고 보니 신랑과 3년을 전쟁하며 캐나다로 가자고 했다. 그럼 왜 나는 그렇게 캐나다에 가고 싶어 했을까.


우선 영어를 공부하고 나서 바뀐 삶은 그전과 후로 나뉠 수 있을 만큼 달랐다. 한 마디로 호주를 기점으로 전과 후는 모든 것이 변했다.

직업이며, 주변 사람들이며, 내 성격이며 모든 것이 변했다. 특히 나는 일할 때에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하며 그 친구들의 문화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러면서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또한 사촌 언니는 캐나다에서 시민권자로 살고 있는데나의 막냇동생은 중학생 때 캐나다로 넘어가 언니네 집에서 지내며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까지 입학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그리 외국에 대해 동경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내 구미를 당길만한 자극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내가 영어유치원에서 일할 때였다. 나는 주로 강남권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아이들은 대부분 소히 말해 잘 사는 부모님의 아이들이었고, 몇몇은 이중국적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나라는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 or 호주.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중국적은 잘 사는 사람들만의 특권일까. 누구나 노력해서 주어질 수 없는 것일까 하고 강한 의문이 뇌리를 스쳤었다.


해외 이민은 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인 것인가?


30대 중반, 호주에서 돌아온 후로 늘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살고 있었고 휴가 때 한 번이라도 외국에 나가지 않으면 온몸이 쥐가 날듯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 드넓은 자연과 자유로움이 늘 그리웠고 연애며 일이며 그림이며 모든 게 허망했다.




호주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다시 늘 바빠졌다. 영어유치원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하고 저녁에는 다시 복학한 대학원을 다니며 논문과 작품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월세에 대학원 학비 이자, 생활비까지 모든 돈을 스스로 벌어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는 결국 나를 기르고 먹이며 살려야 하는 생존에 가까운 삶이 지속되었다.

흔히 말하는 30대가 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내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들이 가진 조건을 왜 나는 가질 수 없는가에 끊임없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는? 나는 과연 할 수 없는 걸까?

내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인 걸까?

누구든 도전 할 수 없는 것일까?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가정사가 있다. 매우 힘든 유년 시절을 겪으며 자라왔고, 늘 애정결핍에 시달린 채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회한이 가득 섞인 채로 이른바 ‘어른 아이’가 되었다. 그리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의지하며 자발적인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내가 몸소 체험한 경험들은 내 삶의 의지를 바꿔나가게 만들었다. 내가 스스로 직접 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주체가 되어 도전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견뎌내는 것이 내가 앞으로도 살아갈 나의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 내 인생의 주체는 나라는 것.


이런 경험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돌파할 수 있는 출구를 끊임없이 찾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되든 안 되든 일단 도전하였다. 실패해도 안 돼도 또 도전했다. 언젠가 될 거라는 나 자신을 믿으면서.

그래서 나는 내가 살면서 작은 일이라도 이룩한 나의 버킷리스트들을 적어놓고 실행하려고 노력한다. 그중 하나가 해외 이민이었다. 나는 여전히 영어를 훌륭히 잘하지도, 모아놓은 자산도 없고, 해외에서 유학을 해본 적도 없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게 어언 10년이 넘은 일이고, 나이는 40대가 되었다. 게다가 내가 책임져야 할 아이도 태어났다. 그랬기에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강북에서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강남에서는 살아 본 적도 없다. 잘 나지 않았지만 하고자 하면 노력하고 뛰어들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큼은 늘 놓지 않았다. 나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해외 이민,

정말 잘 나고 잘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선택 사항일까? 전혀 그렇지 않기에 말하고 싶다.

누구든 꿈을 위해 달려간다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고, 요즘은 똑똑한 젊은 2-30대 청년들이 오히려 더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해외로 나오기 전 만반의 준비를 갖춰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많은 분들도 보았다.


나 역시 그냥 평범한 사람 중의 한 명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길, 이것을 할 수 있다면 해보자고 준비해 본 일이 캐나다 ece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호주는 이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추세이다. 이민문을 걸어 잠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당시 내가 준비해서 이민을 도전해 볼 수 있는 선택지는 오로지 ‘캐나다’ 뿐이었다. 그게 호주가 아닌 캐나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또한 캐나다 ece가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보육교사, 유치원교사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15년 가까이 미술과 영어를 가르친 티칭 경력이 있었던 나는 단연코 ece 준비가 내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한 아이를 낳고 코비드 기간에 2년 동안 홀로 아이를 케어하며 산후우울증도 겪고 마음이 힘든 시간을 보내 던 중으로 이따금 지난 이민 도전 실패에 대해 다시금 상기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자마자 혹시 몰라 ece 자격증을 준비해 두고 싶었고 다행히도 굿 타이밍의 뉴스가 들려왔다. 알아보니 bcpnp ece 커트라인 점수가 낮아지며 Target Draw가 시작되어 이민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정보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캐나다 이민의 열망은 더해갔고 이는 결국 끈질기게 남편과 싸우며 설득하는 과정만 2년이 넘게 걸렸다. 아이를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도전해 보자고, 내가 열심히 알아보고 준비하겠다며 내가 가정의 가장이 되어 사투했다.


나 또한 보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의 부모님에게, 나의 지인들에게, 나라는 사람과 엮인 모두에게 나는 할 수 있다고.


처음 캐나다 이민 이야기를 했을 때 나의 부모님의 반응은 이러했다.

‘어린애기 데리고 가서 힘들게 어쩌려 그래, 너는 그렇다 치고 네 남편은 영어도 못하는데’


내 지인들의 몇몇은 이런 반응을 했다.

‘남편이 그렇게 가기 싫어하고 반대하는 데 도대체 왜 가려고 하는 거야? 이젠 네가 싱글이 아니잖아, 남편 의견도 존중해야지 가족인데’


그럼 나는 대답했다.


그럼 나는???????

나는 가족의 구성원 아니야?


그리고 이어 설명했다.


‘내 꿈이야, 내 버킷리스트이고, 남편에게 의지해서 사는 삶이 아닌, 내가 나의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삶을 내가 만들어 가고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전하고 싶어. 나는 누군가처럼 잘 살지도, 잘 나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잘 살아나가고 있는 것처럼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더 늦지 않게, 후회하지 않게 해보고 싶어. 나는 내 방식으로 도전하는 거니까.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나와 현재까지도 Line으로 늘 여전히 안부를 주고받는 나의 10년 넘은 오랜 대만인 친구만이 이야기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 네가 지금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누구의 말도 귀 담지 마. 너의 꿈이라면 도전해 바. 그게 가령 실패일지라도 도전 자체가 경험이잖아. 내가 응원해 줄게. 내가 아는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이런말이 간절했는지 모른다. 아니 간절했었다.나를 응원해줄 누군가가..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남들을 설득하여 인정받고 도전하려 했던 걸까. 그렇게나 가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을까, 결국 남들은 자기 삶이 바빠서 잊어버리기 마련인데. 말 뿐이 아니라는 것을 내 행동과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나는 해외 이민을 도전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쉽지 않았다 결코. 반대에 부딪혔고 누군가는 내 도전에 의구심을 품었으며 속앓이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또한 준비하는 내내 해야 할 일과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었다.

그래도 해냈다. 누군가가 해낸 그 일을 나도 마침내.


그리고 인생은 늘 타이밍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다면 이를 수 없는 것은 없지 않을까?



내가 너무나 존경하는 김창옥 강사님이 강연하실때 하셨던 그 말이 떠오른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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