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과 통찰-13
개인이나 집단의 편향된 사고와 행동의 예로 ‘공급자(또는 생산자) 관점’과 ‘수요자(또는 소비자) 관점’이라는 2가지 상반된 유형을 볼 수 있다. 또,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기술 중심’인가 ‘시장 중심’인가로 나누는 것도 비슷한 문제이다. 전자는 지난 글에서 다룬 것처럼 관점(view or perspective)의 차이라서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간극을 좁힐 수 있다. 반면, 후자는 초점(focus)의 차이라서 줌인(zoom-in) 또는 줌아웃(zoom-out)을 통해 놓친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기업의 제품 생산자는 탁월한 기능/성능 같은 기술 요소를 중시하지만, 마케터는 시장 개척과 매출 증대를 기대하기에 소비자의 필요/욕구에 주목하게 된다. 기술경쟁력이 부족한 제품으로 계속해서 큰 이익을 만들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기술 측면에서 완벽한 제품을 만드느라 소비자가 원하는 시기를 놓치거나 경쟁자에게 기회를 빼앗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제품 생산자나 마케터가 부문 목표가 아닌 전사 차원 목표 달성에 기여하려면 마치 자신이 CEO가 된 것처럼 한 계단 위로 올라가서 기술도 보고 시장도 보는 식의 줌아웃이 필요한 것이다.
‘기술 중심’ 접근은 기업의 생산 부문뿐만 아니라 이공계 전공자나 기술자, R&D가 주된 업무인 연구원, 그리고 신기술을 활용한 제품/서비스로 시장에서 성공한 경험을 가진 사업가 등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시장 중심’ 접근은 인문/사회 전공자나 경영/관리자, 마케팅/판매/AS 등 담당자, 그리고 영업력만으로 시장/고객 확보에 성공한 경험을 가진 사업가 등에게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기업의 CEO는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폭넓은 시각으로 현상을 이해하고 알맞은 대응 방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사안에 따라서는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줌인을 해 봐야 본질이나 근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문제도 있다. 예를 들면, 부서장이 직원의 퇴사 이유를 겉으로 드러난 ‘담당 업무에 대한 불만족’인 것으로 알고 대응하는 것과 심층 분석을 통해 ‘팀원간 갈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대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게 될 것이다. 전자인 경우, 해당 업무에 적합한 직원을 재배치하거나 업무 자체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식의 국부적 대책을 마련하면 되겠지만, 후자는 팀 또는 사내 의사소통 방식이나 조직 문화를 개선하는 식의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신기술을 개발하거나 기존 기술을 개선해서 제품/서비스, 공정을 혁신함으로써 산업 내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거나 시장에서 높은 기업 가치로 평가받는 기업들은 대부분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이다. 예를 들면, 구글은 2010년부터 ‘구글-X’ (지금은 자회사인 ‘X Development’)라는 ‘문샷(Moon shot)’ 즉, 달을 향해 쏘는 것처럼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은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자율주행 서비스인 웨이모, 예방의학 전문기업인 베일리, 드론 배송 서비스인 윙 등은 완료된 프로젝트이고 우주 탐사, 인간 수명 연장, 양자 컴퓨팅 등은 아직 R&D를 진행 중이다.
기술 중심 접근은 신기술 개발/확보에는 유리하지만, 상업화에 이르지 못할 경우 투자를 회수하지 못해서 기업의 존폐까지 좌우할 수 있다. 한 가지 기술만으로 승부하는 스타트업 경우, 사업화가 지연되면 운영 자금이 부족해서 R&D를 중단하고 사업 자체를 접는 일이 많다. Stevens & Burley(1997)는 ‘3천 개의 아이디어가 300개의 정제된 아이디어, 125개의 소형 실험 프로젝트, 9개의 유망 대형 프로젝트를 거쳐 4개가 상업화되고 1.7개의 시제품이 만들어져서 결국 1개가 시장에서 성공한다’는 것을 문헌/자료 조사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기술/제품 개발 아이디어가 상업화에 이를 가능성은 0.03%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충분한 자금과 시장 지배력을 가진 기업 경우, R&D 실패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추후 새로운 기술/제품을 만드는 데 활용될 지적(知的) 자산으로 축적될 수도 있다.
시장 중심 접근은 소비자/고객, 경쟁 업체, 새로운 진입자 등 현재 또는 미래 시장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제품/서비스, 마케팅, 비즈니스 모델 등을 혁신하는 것이다. 기업, 정부, 학교 등은 소비자/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물론, 경쟁 업체의 기술/제품/가격/협업 전략과 전략 변경, 산업 내부에 등장하거나 외부에서 진입하는 잠재적 경쟁자 등에 대비해야 한다. 기업 경우, 예를 들면, 소비자들이 자사 제품의 기능/성능은 만족하지만, 사후지원 채널이나 직원 응대에 불만족하고 있다면 R&D보다는 고객지원 역량을 먼저 개선해야 할 것이다. 지방 소재 대학이 최상의 교수진으로 최고의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있지만, 학생들은 수도권에 있는 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원한다면, 취업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고 프로젝트 수행 경험을 쌓게 해 주거나 학생의 기대를 바꾸는 식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부도 2000년대 이후에는 국민생활의 편익을 제공하기 위한 과제나 연구자가 제안하는 과제에 대한 지원 비중을 늘려 왔다.
시장 중심 접근은 고객 니즈를 반영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장기/체계적 대응이 필요한 핵심기술 확보, 인재 양성, 파트너와 협업 같은 과업에 대한 투자가 지연되거나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다. 기업이든 국가든 기술경쟁력이 떨어질 경우, 외부 도입 기술에 대한 기술료와 의존성이 증가하고 국내 산업경쟁력도 떨어지게 된다. 정부 R&D 지원이 연구자나 수혜 기업 단위로 쪼개지면 투자와 노력이 중복되거나 R&D 관리의 효율이 떨어지는 식의 역기능으로 나타날 수 있다. AI, 로봇 등 인간을 대체할 수도 있는 기술이 등장하더라도 우수한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정부든 기업이든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업이다. 대학이 학문/지식 탐구라는 본연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직업 교육기관이 돼버리면 국가 혁신시스템에서 대학이 담당해야 할 기초/원천기술 연구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 기업이나 정부 차원에서 의미 있는 신사업은 대부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여럿이서 함께 해야 할 일이기에 장기적인 협력을 통해 성공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 중심 접근과 시장 중심 접근은 문제나 상황에 따라서는 알맞은 방식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으므로 줌인 & 줌아웃을 통해 초점을 달리해 봄으로써 문제 정의나 해법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업 경우, 시장 수요 변화에 대한 지속적 모니터링을 통해 핵심기술은 중장기적으로 확보하고 고객 요구에 대해서는 단기적으로 대응하는 식의 균형이 필요하다. 정부 정책의 수립, 실행 과정도 기술과 시장에 대한 균형있는 이해, 접근이 필요하다. R&D 과제 경우, 목적을 특정할 수 없는 순수 기초연구 외에는 궁극적으로 제품으로 상업화되어 시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 R&D 계획서에 경제적 타당성을 따지고 사업화 계획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은 기본이고 결과물이 시장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시종일관 관리하여야 한다. EU의 R&D 과제 중에는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PM 외에 사업화 목표/계획을 집중 관리하는 전담 PM을 두기도 한다.
1970년대 모토로라가 시작한 기술기획 방법론인 기술 로드맵(Technical Roadmap)은 기술 발전 및 미래 시장 예측을 바탕으로 시기별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최상의 기술 대안과 제품 대안을 선정하기 위한 것이다. 로드매핑(roadmapping)은 구체적으로 아래 4단계를 거치게 된다.
1. 시장 분석: 기대 성과, 시장/사업 촉진요인, 우선순위, SWOT 분석, 차이 분석
2. 제품 대안 선정: 제품 특성과 컨셉, 그루핑, 영향 평가, 제품 전략, 차이 분석
3. 기술 대안 선정: 기술적 해법, 그루핑, 영향 평가, 차이 분석
4. 로드맵 작성: 기술 자원과 미래 시장기회 연결, 차이 분석.
아래 그림(출처: Phaal et al., 2004)은 단계별 활동과 연관관계를 도식화한 것이다.
<참고문헌>
. Phaal et al.(2004), Technology Roadmapping.
. Stevens, G. A. and J. Burley(1997), 3000 raw ideas equals 1 commercial success', Research Technology Management, 40(3), May/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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