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데이터/지식에 기반한 착각 주의
우리나라 정부나 민간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대한민국은 IT 강국’이라는 얘기를 해 왔다. 과연 그런가?
IT(정보기술) 또는 ICT(정보통신기술)는 기본적으로 컴퓨터 하드웨어(HW), 소프트웨어(SW), 그리고 통신(망) 등을 포함하는 기술이다. SW는 데이터와 프로그램, 관련 문서 등을 포괄한다. 데이터는 과거에는 숫자, 문자 같은 정형 데이터만을 다뤘지만, 이제 문서, 사진, 동영상 등 비정형 데이터도 포함하는 멀티미디어를 가리킨다. 프로그램은 알고리즘이나 프로세스 로직을 C, 파이썬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로 구현한 것이다. 이들 SW는 HW와 달리 구체적인 형상이 없어서 쉽게 바꿀 수 있고 한 번 만들면, 큰 비용/노력을 들이지 않고 쉽게 복제해서 쓸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 SW의 그와 같은 특성은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지만, ‘쉽게 만드니까 공짜로 써도 되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HW에 속하는 반도체/메모리,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참고로, 미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우주ㆍ군사 목적으로, 1980년대에는 일본 기업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최근에는 AI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이들 기술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투자를 시작했고 1990년대 이후 삼성을 포함한 민간기업이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5세대 통신망(5G)을 가장 먼저 상용화했고, 10년 내에 상용화될 6G, 제조, 유통/물류 등에 매우 중요한 사물인터넷(IoT) 기술, 그리고 통신망 구축/운영 등에서 강국이라 할 수 있다.
시간 단축, 비용 절감 등 효율화를 위한 전산화, 정보화를 추진했던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SW보다는 HW와 통신 기술의 중요성이나 영향력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상)거래와 모바일/스마트화가 본격화된 2000년대 이후는 SW가 훨씬 더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 이를 미국의 벤처 투자자인 마크 안드레센(Marc Andreessen)은 2011년 기고글에서 “Software is eating the world (SW가 세상을 먹어치우고 있다)”라고 하였다. 물질 기반의 제품/서비스를 생산-판매해 온 전통산업을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신생 기업들이 점거하고 있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실제, 2010년대 이후, 거래-중개 플랫폼 기업(예: 구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 등)이 세계 최고 수준의 가치를 가진 기업으로 성장하였고 디지털 트윈 구현을 선도한 기업(예: 테슬라, 엔비디아, 지멘스 등)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SW 기술 수준은 (2024~2025년 주요 조사 결과에 의하면) 세계 최고인 미국 대비 88~89% 수준으로 기간 측면에서는 1.3년 정도 격차가 10년 넘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국가 차원의 R&D 전략 자체가 선도형(first-move)이 아니라 추격형(fast-follow)이다 보니 그런 결과가 되는데 어찌 됐든 격차를 좁힐 전략과 투자가 부족했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선진국이 앞서 가는 원천/기초 기술(예: OS,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 서비스)에 대한 장기 투자보다는 당장 써먹기 위한 애플리케이션/서비스 개발을 목표로 단기 투자에 치중하다 보니 기술/산업 경쟁력 향상에 미치는 효과는 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투자 부족은 정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도 마찬가지여서 해외 SW 기업들이 인프라/플랫폼을 중심으로 국내 시장에서 20~30%의 수익을 낼 때, 국내 기업은 5~10%의 수익을 내는 식의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기업의 수익이 낮아지면, 새로운 기술/제품 개발 투자를 늘릴 수 없음은 물론 그런 과업을 수행할 인재 개발/육성에 대한 투자도 낮아져서 경쟁력 향상이 불가능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글로벌 시장에서 국산 SW 제품/서비스의 점유율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약 1.2%(2024년 기준)로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국내 시장에서도 국산 SW의 비중은 전반적으로 낮고 미국을 포함한 외산 SW가 주도하고 있다. 이해관계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PC와 스마트폰 운영체제(OS)는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DBMS는 오라클, ERP는 SAP, 클라우드는 AWS와 마이크로소프트, 검색은 구글 등 해외 기업이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한컴오피스, 안랩, 더존ERP, 네이버 검색, 카카오톡 같은 SW가 국내 시장을 지키고 있는 정도이다. 대표적 토종 플랫폼 기업인 네이버, 카카오 등은 검색과 메시징 영역에서 탁월한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네이버 라인을 제외하고는 국내용에 머물러 있고 제조/서비스/농업 등 전통산업은 대부분 해외 기업/솔루션을 활용해서 디지털 전환(DX)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SW 기술/산업의 경쟁력이 낮아서 해외 진출은커녕 국내 시장을 지키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 이른 이유가 전략 및 투자 부족뿐이라면 그것만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지 못해서 효과적인 해결책을 만들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다. 필자는 2017년 SW 미래전략을 탐색하려는 한 컨퍼런스에서, 우리나라 SW 역량이 부족한 근본 원인으로 일관성 없는 정부 정책, SW 수요자의 합리적 사고와 실행 역량 부족, IT와 SW의 의미/범위 인식 오류, 사회/문화적 자본 취약 등을 꼽았다. 나아가 그런 근본적 문제점들이 R&D 결과의 사업화 지연,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을 가진 공급산업, 아키텍트와 컨설턴트 등 고급 인재 부족, 기업/산업간 협력 취약 등의 부차적 문제점으로 파생되는 인과관계를 분석하였다<그림 참조>.
4가지 근본 원인 중에서 ‘IT/SW의 의미/범위 인식 오류’란 SW는 HW나 통신과는 다른 특성을 가진 기술/제품이며 전문 인력의 스킬과 동기부여 방식도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사회/문화적 자본 취약’은 언제부턴가 개인주의, 물질만능, 기술중시 등이 지나치게 커지다 보니 SW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팀워크/협업, 개방적 조직문화와 기업가정신, 기술과 비즈니스의 균형 등이 부족한 환경이 된 것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생활이나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SW는 기술 자체의 참신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용 절감, 기간 단축, 매출/이익 등 성과 향상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SW 개발자는 자율과 책임이 존중되는 수평적이며 도전적 조직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SW 이용자는 제품이 제공하는 기능/성능 못지않게 문화적 요소(예: UI의 친숙함)를 중시한다. 협업이 부족하다 보니 규모가 큰, 고부가가치 SW를 개발-판매할 수 없었고, 큰그림을 그릴 아키텍트의 필요성/중요성도 인정되지 않았다. 크고 복잡한 SW가 많지 않다 보니 시스템 사고(thinking)가 부족해서 단기적, 국부적 해결책이 보편화되었다. 공통 구성품을 여럿이 함께 만들고 활용하는 플랫폼 사고가 발전하지 않아서 각개약진 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고 있다.
<그림>에 표시하지 않은 더 근원적인 문제는 유형 제품의 가치는 인정하면서 무형인 SW나 서비스의 가치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관습이다. SW는 HW와 달리 쉽게 바꿀 수 있고 일단 완성하고 나면 매우 작은 비용/노력으로 얼마든지 복제, 활용할 수 있다. 글로벌 선도 기업은 SW의 그런 특성을 강점으로 활용해서 빠르게 성장해 온 반면, 많은 국내 SW 기업은 제값을 못 받는 SW 개발-운영 사업을 수행하면서 현상 유지에 머물러 있었다. 글로벌 선도 기업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재빨리 상품화한 후 시장/고객 반응에 따라 완성도를 높이면서 수익을 늘려갈 수 있었다. 반면, 국내 기업은 개발자 스스로 자신이 만든 SW의 가치를 주장하지 못하고 사용자/소비자들도 높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식이어서 생산-유통-소비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늘어나지 않았다. 이런 여건에서 투입 인력의 공수(M/M)를 기준으로 SW 개발비를 산정하는 방식이 제도로 정착되었고 납품 완료한 SW의 유지보수 요율도 외산 SW의 절반 수준인 10% 정도로 책정되었다.
이런 전후 관계를 이해한다면, SW 개발비/유지비 산정 기준을 바꾸기에 앞서 발주자나 사업자 모두가 SW의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와 여건부터 조성되어야 한다. 사업자는 높은 가치의 SW를 만들기 위한 기술, 인재, 방법론 등을 갖춰야 할 것이고 발주자는 SW 기술/제품에 대한 이해와 합리적인 성과관리를 통해 높은 가치의 SW를 도입, 활용해야 할 것이다.
AI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국가와 기업 차원의 AI 전환(AX) 필요성도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AI 기술 및 AX에서 세계 3위 국가(G3)가 되기 위해서는 국내 SW 기술, 산업, 인재가 안고 있는 약점을 보강하는 정책/전략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G3는 도달할 수 없는 꿈에 그치거나 도달하더라도 상당한 문제점(예: 상호운용성 부족, 고비용/저효율)과 위협(예: 낮은 신뢰성/ 보안/ 안정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젠슨 황이 ‘AI가 SW를 먹어치울 것 같다’고 한 것은 SW 기업/산업에는 맞는 예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AI 기술 자체가 SW 기술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포함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상당한 시일 후가 될 것이라 예상한다. AI나 SW는 모두 인간이 만든 기술이다. 그러나 인간과 기술 간의 관계는 달라지고 있다. AI는 인간을 넘어서는 지능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SW는 여전히 인간을 중심으로 한 지능이고 그렇게 유지될 것이다. 실제로 AI는 이미 전통적 정보시스템의 플랫폼 계층, 공통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예: 검색, SaaS), 그리고 UI (예: 웹/앱 브라우저) 등 SW를 부분적으로 대체하고 있다. ERP, SCM, CRM 같은 전형적 기업정보시스템 기업들은 자사 플랫폼 계층과 자사/타사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내장/연동하는 식으로 제품/서비스 구조를 재정립하고 있다.
한편, 생성형 AI에서는 AI 모델 자체의 규모가 경쟁력 요소였지만, 추론형 AI를 넘어 에이전틱 AI로 진화하고 있는 지금은 저비용이면서 고효율/고성과를 낼 수 AI 모델과 운영방식이 더 높은 경쟁력을 갖게 된다. 국가나 기업 차원의 AI 시스템 경쟁력은 결국, AI 모델(예: LLM, sLLM), 학습/훈련/실행용 데이터, AI 시스템 개발-운영방식 등이 좌우하게 될 것이며, 이들 중추가 바로 SW 기술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SW의 기능/역할을 인지한다면, 절름발이 AI 강국이 되지 않도록, SW 기술/제품 역량을 높이기 위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략 또는 최소한 다른 경쟁우위 요소의 발목을 잡지 않을 정도로 역량을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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