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숙이의 가장 평온했던 하루
진숙이가 신촌에서 산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이제 서른을 훌쩍 넘긴 진숙이는 국민학교 3학년이 된 덕순이와 1학년이 된 둘째 덕분에 일찍 학부모가 되었다.
십 년 넘게 지내온 동네 언니들에게도 “언니”라는
호칭은 쏙 빼고,
“택이 엄마”, “진경이 엄마”처럼 아이 이름으로 동네엄마들을 불렀다.
얕잡아보이기 싫어 그녀는 늘 서너 살쯤 올려 말했고,
그들처럼 나이 먹은 티를 내며 살아왔다.
가끔 누군가 나이를 물어도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진숙이는 사십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이십대의 솜털을 간직한 애기 엄마의 귀여운 거짓을, 사람들이 다 알고도 눈감아주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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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순이가 다니는 국민학교 운동회 날은 애나 어른이나 모두에게 잔칫날이었다. 교문 앞에는 온갖 장난감을 펼쳐놓은 좌판 장수부터 아이스크림, 솜사탕 장수까지
변두리 국민학교 운동회치고는 제법 큰 행사였다.
아이들은 신나서 뛰어다녔고, 진숙이와 나란히 돗자리를 편 동네 언니들도 이날만큼은 새벽부터 김밥을 말고, 거울 앞에서 분주히 치장했다. 누가 운동회의 주인공인지 모를 만큼 다들 한껏 힘을 주고 나온 날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최대한 날씬해 보이려 몸을 45도로 틀고 키 순서대로 서서 웃었다.
“세상살이 각박하고 힘들다 해도, 니 얘기 내 얘기 하다 보면 결국 거기서 거기지.”
그렇게 말하며 친정 식구에게도 못 할 얘기들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를 건넸던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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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진숙이는 깨끗하게 비운 찬합과 돗자리를 접어 들고
한 손으론 덕순이의 손을 꼭 잡았다.
둘째는 늘 그렇듯 혼자 신이 나 앞서 달렸다.
아이의 손바닥엔 하루 종일 햇빛을 쬐어 따뜻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운동장에서 들리던 함성도, 스피커에서 울리던 교가도 이제는 멀리 희미해졌다.
진숙이는 문득 생각했다.
오늘 하루가 어쩐지 벅차고, 비현실적이라고.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어보니
하루하루가 버겁고 낯설었다.
그랬는데—
오늘만큼은 마음이 묘하게 꽉 차 있었다.
눈앞은 시끌시끌했지만, 마음만은 평온했다.
“엄마, 나 달리기 3등한 거 봤어?”
덕순이의 목소리가 진숙이의 생각을 끊었다.
진숙이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네. 엄마도 덕순이 덕분에 신나게 응원했잖아.”
집으로 들어가는 길 끝엔
동네를 지켜주는 우산봉이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삶이란 게 별거 있나—
걱정 없이 아이의 웃음이 함께하는 지금이,
어쩌면 가장 단단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진숙이는 그렇게,
삼십대의 한 찰나를 오래도록 마음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