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시, 삽화: 미국 삽화가 마일로 윈터(1916)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참 묘합니다. 모든 것을 키워내는 눈부신 성장의 시간이지만, 한편으론 가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듯한 폭풍우를 품고 있으니까요. 시 속의 언덕은 이미 그 사실을 아는 듯했습니다.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것을, 행복 뒤에는 시련이 찾아온다는 삶의 이치를 말입니다.
잃어버린 토끼를 슬퍼하는 언덕과 함께, 시인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의 내리막길을 향해 갑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무엇을 잃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쫓기듯 막막한 시간을 건너고 있는 우리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가 다정한 위로를 건네는 건 마지막 구절 때문일 겁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던 고통의 시간들이 실은 차곡차곡 접히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 펼쳐지는 날, 우리는 전혀 다른 풍경 앞에, 조금은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서 있게 되리라는 약속. 지금 당신이 걷고 있는 그 내리막길의 끝에는, 분명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