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먼지쥬스 Aug 29. 2019

[리뷰] <데드 돈 다이> 짐 자무쉬식 스트레스 해소법

이 영화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스포일러를 포함하는 글입니다.



누구나 갱생이 필요해


뜬금없지만 딴 얘기 잠깐. 이 나라에 헬조선이라는 별명이 붙은 지도 꽤 됐다. 소득수준이나 생활수준이나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국민들의 행복수준은 좀처럼 상승하지 않는다.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중 하나로 갱생가능성이란 것을 생각해본다.


갱생은 흔히 전과자의 사회적 재활을 말하지만 그보다 넓은 의미로 말해볼 수도 있다. 갱생, 말 그대로 인생의 갱신. 이번 생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이 나라는 그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편이다. 조건이 그렇다. 국토는 좁고 그중에서도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더 좁다. 그런데 인구는 과밀하며 그중 절반은 수도권에 집중되어있다. 또한 여느 나라보다도 통신망이 폭넓게 보급돼 온라인이 일상과 밀접한 초연결사회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과 SNS에 축적된 누군가의 과거에 접속할 수 있다. 게다가 뿌리 깊은 유교문화권이다. 아직도 명절이면 친지들이 큰집에 모여 서로의 대소사를 공유하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는 나와 생전 면식도 없는 친지들이 우르르 찾아온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과 사람이 매우 끈적끈적하게 얽혀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거기에 바탕한 기대들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강력하게 개입한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도 관계 속에서 축적된 과거와 기대의 망령들이 뒤통수에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접착력이 강력한 스티커처럼 떼어내려고 해도 기어코 흔적을 남기고 만다. 미국 영화나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볼티모어 주에서 벌목공의 자식으로 나고 자라다 플로리다 주로 이주해 해변의 서퍼로 살아가는 식의 부표 같은 인간상을 한국의 서사에서 찾기 힘든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이 나라에선 한번 이력서를 쓰고 나면, 대개 그 반경 안에서 살아가거나 소멸한다.      


한국이란 나라의 특수성에 빗대어 갱생의 어려움을 말하긴 했지만, 사실 지구 위 어디에 사는 누구에게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래 살수록, 더 많은 이력과 관계가 쌓일수록 더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이를 테면 한 분야의 거장으로 노년을 맞은 짐 자무쉬 감독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짐 자무쉬로 산다는 것

   

관객들이 짐 자무쉬에게 갖는 기대는 압도적이다. 그의 영화들이 일관되게 보여준 독창적인 정서들과 내면적인 서사의 흐름, 시적인 대사들은 이제 그를 감독을 넘어 하나의 장르로 구분 짓는다. 그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한 권의 고전이며 그의 이름은 형용사처럼 쓰일 수도 있다(이 영화는 마치... 짐 자무쉬스러운데?). 짐 자무쉬를 사랑하는 관객들은 그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그들이 사랑했던 짐 자무쉬들을 떠올리며 극장의 어둠 속에 잠길 것이다. 짐 자무쉬가 그들을 처음 반하게 만들었던 순간의 그 감동이 재현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스크린의 반대편에 있는 짐 자무쉬의 기분은 어떨까? 관객들의 설렘만큼 짐 자무쉬도 그들의 기대가 설렐까? 한적한 수요일 오후에 단골 카페 볕 좋은 자리에서 멍을 때리는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찾아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십 년 동안 사랑해왔다고 고백한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전세계 영화팬들이 발산하는 기대의 총합을 한 사람의 몸으로 견디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들의 기대가 만든 예상범위의 경계를 넘어 또 한번 새로운 감동을 창조하기 위해, 짐 자무시는 얼마나 먼 길을 달려야할까? 그것도 1953년식 노구를 이끌고 말이다. 그런 짐 자무쉬에게 누군가 이런 뻔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활동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시나요? <데드 돈 다이>는 거기에 대한 대답 같은 영화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짐 자무쉬가 좀비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크게 놀랍진 않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취미는 익히 알려져있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뱀파이어 얘기였고 <고스트독>은 사무라이 킬러 얘기였다. 이 영화가 기존의 짐 자무쉬 영화와는 전혀 다른 점은 따로 있다.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포기한다는 점이다. 사실 포기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 것 같다. 메시지를 포기하는 태도 자체가 다분히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4) / 고스트독(2000)

밑밥이 많은 영화다. 개성있는 캐릭터를 가진 인물들이 골고루 분량을 나눠가진 채 등장한다. 그들 중 몇몇은 미스테리하게 포장되어있고(장의사 젤다, 숲 속의 밥), 몇몇은 마을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으로 배치되며(힙스터 여행자들, 소년원의 아이들) 좀비가 나타났을 때 이들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게 될지 기대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주인공 격인 로니는 알 수 없는 순간마다 “끝이 좋지 않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되뇌며 의미심장한 복선을 곳곳에 설치한다. 로니와 클리프는 순찰차를 몰고다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dead don't die’라는 컨트리송을 감상하는데, 관객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이 노래가 대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노래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좀비가 등장한다.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기어나와 이 평화로운 마을의 오래된 질서를 전복시킬 차례다. 모든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차례다. 서로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존자 그룹으로 뭉쳐 해결책을 찾아나갈 차례고, 그러나 한 명씩 무리에서 벗어나 희생될 차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애초에 블랙코미디를 의도했으니 그 과정이 아주 심각하게 그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적당한 농담과 시의적절한 메시지가 짐 자무쉬의 노련한 황금비로 녹여져 우리에게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실현되지 않는다. 결말을 향해갈수록 영화는 심각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각자의 역할을 골고루 나눠가진 것처럼 보이던 인물들은 그들만의 결말을 향해 흩어지고, 그 결말마저 큰 의미 없다. 좀비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다 목숨을 잃거나 좀비가 된다. 이 영화의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던 미스테리한 인물들은 영화의 전개와는 큰 관계 없는 각자의 산으로 간다. 시체에 분장을 시키는 취미가 있고 일본도를 근사하게 휘두르며 경찰 로니를 짝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던 장의사 젤다는 알고 보니 외계인이어서 UFO를 호출해 좀비범벅인 마을을 남겨두고 지구를 떠난다. 한평생 숲속에 살며 외톨이로 지내지만 마음만은 순박했던 것처럼 보이던 숲 속의 밥은, 마을에 위기가 닥쳤을 때 무언가 한 건 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하지만 그저 숲속에서 망원경으로 좀비로 덮여가는 마을을 시종일관 관찰할 뿐이다. 게다가 초반에 프랭크가 기르는 닭을 훔쳐먹은 것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처럼 보이던 그는, 숲 속에서 프랭크의 닭을 구워먹으며 망원경 너머 프랭크의 죽음을 지켜본다. 소년원에 갇혀있던 3명의 소년소녀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정말 아무 역할도 없다. 다만 장롱 안에 몰래 숨어있다가 소년원을 몰래 빠져나가는 게 전부다. 그렇다면 이 허탈하게 흩뿌려진 결말들은 영화적 실패일까? 그렇게 단정하긴 힘들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네가 알던 내가 아냐


로니는 영화 초반부터 계속 ‘끝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곱씹는다. 주인공이 계속 곱씹다보니 관객도 그 말을 곱씹게 되는데, 좀비로 둘러싸인 순찰차 안에서 모든 것은 허무해진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클리프에게 로니는 대답한다. 사실 자무쉬가 내게 이 영화의 결말을 미리 알려줬거든. 그러자 클리프는 말한다. 자무쉬가? 나한텐 안 알려줬는데. 별안간 영화 바깥의 감독의 존재가 소환되고 영화 속의 인물들이 배우임을 자백한다. 영화는 스스로 선을 넘는다. 안과 밖의 프레임을 무너트리며 최소한의 긴장감마저 놓게 만든다. 이미 영화가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아직 무언가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상황에 몰입하고 메시지를 건져올리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쯤하면 너도 알지 않겠느냐고. 이 영화에서 너가 얻어갈 건 없으니 힘 빼라고.


의미심장하게 등장했던 동명의 음반 ‘dead don’t die’는 이미 몇 개의 씬 전에 달리는 순찰차 밖으로 내팽개쳐진 지 오래다. 클리프가 음반을 창밖으로 내던지며 이 지겨운 노래 좀 그만 들으라고 일갈했을 때 관객은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 영화의 밑밥들은 모두 맥거핀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 자체가 맥거핀이다. 의미 있어 보이던 모든 것들이 의미 없는 결말에 도착한다. 관객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 짐 자무쉬라는 클리셰를 역으로 이용해 허무감과 싱거운 웃음을 안겨준다. 그러기 위해 설계한 영화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답은 뻔하다. 이런 영화는 감독의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다. 마치 짐 자무쉬의 홈파티 같은 영화다. 그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한자리씩 차지했던 친구들을 마당에 불러놓고 가면을 하나씩 쥐어줬을 따름이다. 감독도 자신의 얼굴 위에 새로운 가면을 쓰고 어깨 위에 더께처럼 쌓인 긴장을 잠시 내려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느낄 당혹감과 허탈함을 상상하면서 행복해했을지도 모른다. 짐 자무쉬도 때로는 엉터리 영화를 만드는 무명의 B무비 감독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사실 누구나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나라는 사람을 따라다니는 명함을, 가격표를, 이력서를, 주석들을, 오래된 망령들을 떼놓고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