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튼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래서 지난 번 루이스(Lewes)에 대한 글 부터는 브라이튼에서 내가 다녀왔던 크고 작은 동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브라이튼에서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서 거리가 꽤 있는 곳까지 범위를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오늘은 브라이튼에서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작은 동네, 영국 남부 해안의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라고 불리는 하얀 해안 절벽이 시작되는 동네, 시포드(Seaford)라는 동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세븐시스터즈로 가는 길
여행객들이 브라이튼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븐 시스터즈를 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세븐 시스터즈에 대한 글에서도 말했지만, 브라이튼에서 세븐 시스터즈까지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한시간 남짓 타야하고, 크고 작은 동네를 꽤 여러 개 지나야 한다. 버스가 동네 한복판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영국의 작은 동네를 구경할 수 있는 좋은 코스이기도 하다.
내가 시포드라는 지명을 알게 된 것은 세븐 시스터즈로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하는 탓에 버스 안에서 주구장창 지도를 보고 있었는데, 세븐 시스터즈에 거의 도착할 무렵 버스는 시포트란 마을을 거쳐갔고, 그와 동시에 나도 시포트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발견했다. 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세븐 시스터즈에 가기 위해 버스에 계속 머물러 있었고, 시포드라는 지명은 내 머리 속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브라이튼 근처에서 어디 가볼만한 곳이 없을까 고민하면서 지도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영국 남부 해안가를 훑기 시작했고, 브라이튼에서 비교적 쉽게 다녀올 수 있는 시포드가 내 다음 목적지가 되었다. 세븐 시스터즈에 가는 길에 잠시 스쳤던 인연이 이렇게 그곳이 최종 목적지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돌아오는 주말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시포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 색깔이 있는 해변
시포드는 중세 시대만 해도 영국 남부의 주요 항구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침략으로 항구의 위세가 많이 쇠퇴했다가 20세기 들어서면서 진행된 해변 정비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영국 남부 해안의 여름 휴양지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양 옆에 있는 큰 동네, 브라이튼(Brighton)이나 이스트본(Eastbourne)에 비하면 명성이나 규모에 있어서 매우 작은 편이다.
내가 시포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해변이었다. 사실 시포드에서 가볼 만한 곳이 해변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 될 정도로 동네 자체가 작고 아담하면서, 시포드를 상징할 만한 건축물이나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해변으로 향했고, 해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해변이 모래사장인 반면, 영국 남부 해안은 주로 자갈로 된 해변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처럼 고운 모래를 느낄 수 있는 해변은 아니지만, 걸을 때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꽤 매력적이다.
시포드의 해변 한쪽에는 과거 프랑스와의 오랜 전투를 상징하는 듯한 대포 하나가 늠름하게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인상적인 작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들의 목적을 확실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같이 간 친구들과도 이런 저런 추측을 많이 해봤는데, 대부분이 화장실 또는 탈의실일 것이라고 했다. 궁금함을 못 잡고 이 건물들에 대해서 집에 돌아가서 찾아보니까 작은 원두막이었는데, 시포드 정부에서 운영하는 숙소 겸 별장이었다. 2021년 기준으로 1주 동안 빌리는데 5~6월은 125 파운드(약 200,000원), 7~9월은 150파운드(약 240,000원)이다.
□ 세븐 시스터즈의 시작
시포드의 또 다른 매력은 마을 옆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우리는 해변을 벗어나 언덕을 올라갔다. 그곳에 오르면 시포드의 마을 전경과 아름다운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바라보는 해변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그 뒤로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작은 동네다 보니까 높은 건물이 없고 자연친화적인 색깔을 활용한 영국 특유의 주택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에 펼쳐진 초원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갔다. 그러자 하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브라이튼에 머물면서 이미 세븐 시스터즈를 여러 번 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큰 감흥이나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이 하얀 절벽이 인상적이진 않았지만, 바다로 이어지는 절벽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긴 했다. 그리고 지도를 열어서 살펴보니까 바로 이곳이 세븐 시스터즈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브라이튼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작은 동네, 시포드에 다녀왔다. 시포드는 영국 사람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동네일 정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작은 곳이다. 나도 브라이튼이 아니라 다른 곳에 머물렀다면 시포드란 지명 자체를 몰랐을 것이다.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필연, 나와 시포드는 그렇게 필연적으로 만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작은 동네인 탓에 볼 만한 것도, 즐길 만한 것도 마땅히 없지만 그래도 아름다웠고, 작은 동네 특유의 한적함과 조용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동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