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2 직장
생계유지 수단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먹고사는 문제다 보니 진지하면 한없이 진지하지만, 적당히 대충 아무거나 하자면 또 아무거나 한다고 굶지는 않는다.
꿈이나 목표, 장래 희망 같은 말로 거창하게 포장한 직장은 반드시 무언가 찾아야 끝나는 인생의 거대한 목표다.
그 끝에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인생의 간극에 존재하는지 알 도리 없는 신을 붙들고 눈물짓기도 하며 진실로 도달했는지 알 길 없지만 적당히 만족하기도 한다.
실제 당장 취업할 적당한 조건의 자리를 얻어 20년, 30년 이상 근무하며 인생을 잘 꾸려가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십여 년에 걸쳐 직장을 얻으려고 수험 생활을 했다.
물론 그동안의 모든 수험의 결말이 좋지 않았으니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첫 오 년 여의 수험 생활이 끝나고 다음 오 년 여의 수험 생활 암흑기에 들어가기 전, 잠깐 일을 했었다.
첫 수험 기간이었던 오 년 동안 순수하게 공부만 한 터라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취업이나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숨 쉬는 비용이 필요하다.
성인이 된다는 건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 비용이 발생함을 뜻한다.
취업하려면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최저 비용이 든다.
지금은 취업을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지만 당시엔 지금처럼 보조받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일을 구하려면 핸드폰이 필요했는데 요금제를 살리면 벌써 핸드폰 요금이 발생한다.
그때 경력이 단절된 지 3년 이상이었던 나는 이력서를 넣어도 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취업이 마음 같지 않으니 다시 공부 생각이 들었으나 첫 오 년 동안 뼈저리게 깨달은 건 긴 수험 생활 뒷바라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취업보다 곱절은 많은 돈이 필요했고 당장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결국 계속 부모님께 기댈 생각이 아니면 뭐라도 해야 했다.
첫 직장을 대학 시절 담임 교수님 밑의 학교 기업에서 웹 프로그래머로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할 시점에 사회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과 로봇 산업 붐이 크게 일었다.
국가 단위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를 키우려고 혈안이 되어 R&D 비용을 천문학적으로 이공계에 투자하는 상황이었다.
배운 게 배운 거라 개발자로 재취업을 생각해 봤지만 프로그래밍 언어는 고대 유물 수준으로 잊어버린 상태라 다시 익힐 생각에 눈앞이 까마득했다.
뭘 만들 만큼 복구하려면 최소 1년은 걸릴 듯 해 당장 일할 자리를 생각하니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 1년이 지금 엄청난 나비 효과로 돌아와 벌이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30대에 늦게 준비해서 취업도 하는데 20대에 아르바이트하면서 1년 공부하는 시간 보내는 걸 왜 아까워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수험 생활도 망했고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니 열정이 없어서 하기 싫었던 게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땐 개발자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지는 거라고 여겼다.
수험이라는 인생의 치열한 전투에서 대패하고 비참한 와중에 고개까지 숙여야 한다니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다시 변리사 수험으로 돌아가서 모든 걸 만회하고 싶은 생각에 습관적인 집념이 생겼다.
변리사 시험은 기본적인 법 과목을 배웠는데 공부한 내용을 써먹을 수 있는 직장을 찾으려고 애썼다.
사촌 중에 법무사 사무소에서 근무했다던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서 법무사 사무소에 이력서를 넣었다.
다행히 금방 직장을 얻었고 출근할 수 있었다.
등기팀에 근무하면서 주로 서류 수발 및 배송을 담당했고 주 거래처에 들러 서류를 받아 등기소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법무사 사무소는 별의별 업무를 맡았지만 나는 대부분 등기 서류 담당이었다.
한 달 정도 일해보니 경력을 어느 정도 쌓으면 급여도 넉넉하고 일도 안정적이어서 1년 후엔 다시 내 수험 생활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의 나는 자격지심에 정신을 지배당했고 공부는 다 때려치우고 이대로 주저앉을 거냐는 말에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때도 줏대 없이 압박한다고 욱해서 내가 세워놓은 계획을 다 무너뜨리고 스스로 죽을 길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험에 지치고 마음이 자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원하지 않은 고생을 짊어지니 공부가 더욱더 하기 싫었다.
미칠 것 같은데 그만둘 수도 없고 이미 5년 공부하는 동안 문제가 뭐였는지 명확히 알면서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하나만 남아 억지로 나를 밀어붙였다.
당연히 공부가 되겠는가.
당장 때려치울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놀지 않아도 좋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어도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미칠 것만 같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 놓지 못하는 미련한 내 모습이 거지 같았다.
그렇다고 나마저 나를 포기할 순 없으니 어떻게든 공부를 꾸역꾸역 해 나갔지만, 계속 눈물만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끊임없이 고문하며 욕심을 채우지 못해 아득바득 매달리는 꼴이었다.
고통을 견디며 수험 생활을 겨우 이어갔지만, 예상대로 얼마 가지 않아 금전 문제가 생겼다.
이미 예상했던 터라 출퇴근 시간이 고정되지 않은 보험설계사와 학습지 교사를 구직했다.
안정적인 급여를 받는 건 아니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물론 공부가 하기 싫었던 나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공부를 멀리 뒷전으로 보내버렸다.
그냥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 그만둘 핑계를 어떻게든 만들고 싶던 발악이었다.
일을 하니 공부를 덜 해도 되고 공부를 덜 하니 언젠가 시험을 포기하겠지 같은 어리석음의 굴레 안에서, 폭력 남편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처럼 종속된 채 언젠가 끝날 때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멍청한 짓을 반복하며 10개월이 지나자 정신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나에 대한 실망감과 시험에 질질 끌려다니며 끊어내지 못하는 미련함과 결정 하나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멍청함에 탄복하며 하루하루 신세 한탄이나 하는 꼴이 아주 못 봐줄 지경이었다.
눈 뜨면 왜 사나 싶고 뭘 먹으면 자격이 있나 싶고 놀면 시간 아깝다는 생각에 좌불안석이었다.
운이 좋게도 이후 동생이 청주에서 먼 위치에 집을 사고 얼마 안 가서 장가를 간 덕택에 나는 집을 관리하며 지낸다는 핑계로 한동안 내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과정에서 부모님 마음에 대못을 박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고 그 일로 1년이 넘도록 불안에 떨었지만, 그 1년 덕분에 지금이 있다.
한숨 돌리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고 나를 볼 수 있었다.
시간 낭비했다는 안타까움과 어리석은 나를 향한 연민이 뒤섞여 인생이 참 씁쓸했다.
그 후로 누가 장기 수험 공부 시작한다고 하면 일단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동생 집에서 살면서 잠깐 근처의 독학 기숙학원에서 일했다.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아마 그 친구를 알지 못했다면 또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나를 정리하고 재정비하는 중요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이었던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하면서 객관적으로 내 상황을 판단해 볼 수 있었다.
그 친구는 20대 초반의 여자애였다.
나와 전까지 일면식도 없던 사이로 아무 이해관계가 없어 재고 따진다거나 눈치 볼 필요 없이 무슨 이야기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니 자연스럽게 싫어졌던 공부가 다시 좋아졌다.
책도 읽고 놓았던 공부에 흥미가 생기면서 나는 다시 내 인생 계획을 세웠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년 6개월 전쯤 정착할 직장을 잡은 나는 무척 행복했다.
드디어 내 인생에 직장 안착이라는 걸 해보는 날이 오는가 싶어서 감동에 감동을 더했다.
나에 대해 주변에서 누가 뭐라든 매일 행복한 날이었다.
다만 2년 6개월이 지나고 나서 회사 사업 계약이 순식간에 종료될 줄 알았겠는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계약 연장 이야기가 오가더니 사업 종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 직장 안착의 꿈이 실직 엔딩이 될 줄 몰랐다.
그동안 사업을 한 기간이 있어서 쭉 끌어왔기 때문에 계약 기간이 만료되더라도 재계약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길 들어서 그럴 줄 알았다.
역시 세상만사 사람 마음 같지 않다.
막상 하루아침에 실직하고 나니 회사 생활이 나름대로 재밌었구나 싶었다.
시에서 민간업체에 사업을 맡기는 민간 위탁 방식의 사업체로 심리 상담 및 심리 교육이 주 사업이었다.
나는 센터 행정 업무를 보는 행정 직원으로 근무했고 일은 매달, 매년 똑같이 돌아갔다.
행정 부서 내 직원도 나 하나뿐이어서 사수가 없다는 슬픔과 누구도 터치하지 않는다는 기쁨을 함께 겪었다.
덕분에 매년 회계감사 때마다 팀장님하고 제출 자료 작성하느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했다.
나는 일반 행정 관리 업무가 완전히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취업 전에 세무, 회계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거기서 배운 내용과 업무가 사뭇 달랐고 기본 개념 이외에는 전부 일하면서 익혀야 했다.
더군다나 공공기관 서류 업무는 완전히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류 결재받을 때마다 나 홀로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일에 적응하자 제법 여유가 생겼다.
앞일 모르니 업무 관련 자격증 준비도 하고 틈틈이 운동도 다니고 노후 대비도 하고 대학원도 입학했다.
생활이 안정되고 정해진 급여가 생기자 바로 일상 자체가 건강해졌다.
누가 압박하지 않아도 내 걱정은 내가 제일 많이 한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매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건실하게 한다.
금전적 여유가 생기니 마음에 공간이 생기고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번엔 월급이라는 안정제에 지독하게 중독된 것이다.
규칙적 생활하는 습관이 부수적으로 생긴 건 두말할 것 없다.
퇴직 후에도 푹 퍼지고 늘어져 한껏 게으름 피울 수 있겠지만 가능하면 회사 다니던 루틴을 지키고 싶어 매일 출근하듯이 기상한다.
출근해서 일을 했던 것처럼 지금은 집에서 글을 쓴다.
시간을 훌륭하게 보낸다는 신호로 사용했을 때는 뿌듯한 걸로 끝났겠지만, 지금은 동기부여 이상의 느낌이 든다.
내 인생이 길이라면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이다.
퇴사 후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지난 2년 6개월은 인생에서 일의 의미를 상기해 보는 좋은 경험이었다.
장기 근무자에 비하면 채 3년이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꾸준히 일하면서 알차게 시간을 활용한 기회였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 해 온 고생의 마침점처럼 마지막으로 좋은 습관을 선물해 준 것이다.
월급 중독자로 다시 태어난 지금 다음 취업을 생각하면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런 날을 위해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열심히 다녔다고 생각하니, 대략 20년가량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친다.
인간이란 참 투자처로 적당하지 않다.
특히 그중에 나 자신이 가장 그렇다.
투입 대비 출력이 너무 미미해서 이게 맞는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걸 충족하기 위해 들어가는 입력 단위는 한도 없이 늘어날 수 있다.
애초에 인간의 욕심이란 화수분과 같아서 뽑아도 뽑아도 마르지 않는 신비의 샘물이다.
모든 욕심을 충족하기에 세상과 물자는 한정적이고 전부 갈아 넣는다고 해도 만족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출력된 결과물을 보자면 썩 타율이 높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유물과 보물을 세어 보면 그 수가 꽤 된다.
인류 전체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이야기이며 개개인의 삶으로 들어가면 빈도는 순식간에 줄어든다.
소수의 천재가 다수의 인류를 이끌고 있다는 말이 괜한 헛소리가 아닌 셈이다.
내 또래만 봐도 역사적으로 남을만한 업적을 이룬 이가 얼마나 되던가.
오랜 시간 공부하며 숙성한 시간이 성적표처럼 정확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로 들이밀 수 있는 객관적 지표가 되는 인생이 되는 건 쉽지 않다.
초, 중, 고의 20년가량 되는 숙성의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시간이었는지 좋은 학벌로 증명하고 좋은 학벌이 좋은 직업으로 이어져 훌륭한 투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다행이지만 통계적인 지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넉넉하게 잡아 80%에 육박하는 인생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투를 벌이며 살아간다.
만약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80 넘은 노인이 돼서 죽기 전에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 따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다수가 여전히 인간이 무엇이고 왜 사는지를 묻는다면 일생에 걸쳐 어떤 결과를 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내 이야기에 국한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학부모님 이야기와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나와 상황이 크게 달라 보이진 않는다.
전 국민이 제 몫의 일을 할 때까지 겪는 대한민국민 숙성의 18년이란 얼마나 오래고 긴 시간인가.
술도 그 정도 오래 묶고 익히면 명품이 돼서 꽤 비싼 값에 팔린다.
나를 보자면 인간적으로 그 정도 명품은 아닌 것 같아서 때론 술보다 못한 게 아닌가 싶다.
술 한 잔 할 때면 술잔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나보다 나은 녀석에게 황송하다며 큰절이라도 올리고 황송하게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첫 직장은 대학에서 학교 기업을 운영한 교수님 밑이었다.
정보통신학과를 졸업해서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그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주변 친구들이 받는 급여에 비해 풍족했지만, 편도 2시간 반, 왕복 5시간에 가까운 극악 난이도의 출퇴근 시간 덕에 아주 빡빡한 첫 회사 생활이었다.
물론 첫 월급을 받고 사고 싶은 거 사고 쓰고 싶은 거 쓰며 짜릿한 월급 탕진의 기쁨으로 고통스러운 출퇴근 시간쯤이야 금세 망각하긴 했다.
그때 처음 느낀 게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지만 돈이 많으면 확실히 불행할 확률은 적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돈이 없다가 갑자기 생기니까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쓰다가 나중에 퇴사할 즈음엔 수중에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돈은 금방 생기기도 하지만 모래알처럼 소비하는 나의 손가락 사이로 쥐도 새도 모르게 금방 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6개월 동안 사치 속에 살며 직접 몸소 깨우쳤다.
첫 회사 다닐 때 익히지 못한 금전 감각은 내 인생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커진 소비력과 잡지 못한 절제력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내 인생의 가계를 종종 휘청였다.
첫 소비 경험을 제대로 길들이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니 나이를 먹어도 쓰기 위해 버는 습관이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최근에 들은 취업 교육 때 세무회계에 관심을 둔 이유다.
계정 과목 외우고 세금 계산하는 방법 배운다고 돈 관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금전 감각을 익혀야겠다고 처음 관심을 두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안정적인 직장이 처음이라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다.
늘 그렇듯 사용처를 정해두고 수입을 적당히 배분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고용 기간이 넉넉한 직장이라 매달 정해진 수입이 꾸준히 들어왔다.
안정된 현금 흐름이 생기고 수입을 배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과정에 맞춰 지출을 해봤다.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세우고 안정적인 수입을 토대로 벽돌 쌓듯 필요 항목을 하나하나 얻어갔다.
단계별 스테이지가 있는 게임처럼 미리 그려둔 스케치에 원하는 채색이 됐다.
아마 이런 맛에 다들 직장 다니는 게 아닐까.
직장은 마약 못지않아서 중독처럼 일정한 환경에서 적응하고 월급에 길이 들어져 살다 보면 그 안락함에 푹 절여진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대단한 의미가 있어서 시간을 똑같이 보내도 허무하지 않고 무언가 남는다는 착각을 준다.
실제 계좌에 결과물이 꽂히며 손에 직접 쥐어볼 수 있으니 착각만이라고 할 수 없기는 하다.
그래서 최근 겪은 가장 심각한 중독 증상은 월급 중독이다.
인간 육신은 오직 산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서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이다.
자고 먹고 싸고 움직이는 데 투입해야 할 열량이 만만치 않고 그보다 고차원적으로 생각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양질의 에너지 투입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여행이나 학습, 특별한 상황의 경험, 인간관계처럼 다양한 상황이 필요한데 거기엔 더 많은 에너지의 투입을 요구한다.
에너지란 인간 사회에서 돈으로 대변한다.
원시인 시절에야 물물 교환으로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1차원적 물물 교환으로는 특수한 상황이나 경험이 생기기 어렵다.
직장이나 직업은 그 중요한 투입을 위한 돈을 벌 수 있는 주요 수단이며, 사회에서 나를 설명하는 푯말이다.
주로 어디에서 누구랑 뭘 하며 사는지 직장이나 직업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놀라운 개념이다.
그래서 학창 시절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공부 열심히 해서 인적 네트워크의 질을 올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시는 것이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말과 ‘근묵자흑’ 또한 같은 이야기 아니겠는가.
선과 악, 도덕의 차원에서 보자면 직장이나 직업과 전혀 다르겠지만 단순하게 투입을 위한 수단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아직도 사회에서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고 특히 노후가 안정적이지 않은 사회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개개인의 가치와 인생관이 참 중요해 보인다.
사회에서 부품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타인이 나를 부품으로 본다고 내가 실제 부품이 되어 움직인다면 수요와 공급점이 맞아떨어지니 세상이며 사람이며 과거와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
적어도 수요가 그렇다 한들 공급마저 같은 뜻일 필요는 없다.
내 가치관을 가지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내가 열어가는 것도 삶에서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