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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듀군 Nov 25. 2021

내 몸은 멈췄지만, 마음의 행복은 여전히 달리고 있다

아버지와 나의 아름다웠던 10km 마라톤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발견


2021년 11월 5일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의 기록.

아버지와 나는 길거리라는 무대에 섰고, 10km 마라톤이라는 공연을 마쳤다.


우리는 jtbc 마라톤 신청 후 약 3주간을 부단히 준비했다. 준비 속에 행복이 있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설렜고, 아버지의 미소엔 ‘완주하리라, 얼른 끝내보리라’는 옹골찬 다짐이 있었다.

우리의 마라톤은 3주 전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당일이 되었다. 그날의 날씨는 꽤나 쌀쌀했고, 안개가 자욱했다. 우리는 제공받은 티셔츠를 입고 양말을 신었다. 우리가 준비한 건 다짐이었다.

by pixabay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달리는 도중 울상을 지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했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기도, 서로를 칭찬하기도 했다.


형태가 뭐가 됐건 뭐 어떤가.

우리가 달렸던 길거리는 우리의 무대였고, 주인공은 우리였다. 마치 관객 없는 무대의 독백이 메아리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만 같았다. 무정형의 소리는 꽤나 짜릿했다. 우린 그 힘으로 계속 달렸다.


위의 생각들은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 당시를 그대로 회상해보면,

우린 그냥 그 순간을 즐겼다.

생각 없이 계속 달렸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45p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는 중 대화는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달릴 때 무슨 생각을 하건, 달리는 그 자체, 그 순간을 정겹게 생각하는 그것 하나로 충분했고 감사했다.


8km쯤 되었을까, 아버지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의 다리를 놓아주고 싶으셨나 보다.

하지만, 2km를 남겨두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항상 아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던 아버지의 위로를 이제 내가 전해줄 차례였다. 아버지는 나의 말에 반응한 듯 악착같이 달렸다. 나도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임에 감사했다.


by pixabay

결국, 우리는 우리만 보이는 노란색 띠로 이뤄진 결승선을 통과했다.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끝까지 달려줘서 고마워요"

아빠는 대답했다. "아들 덕분에 해냈다.."


사실 '누구 덕분에'라는 말을 들은 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한마디로 자체로 뭉클했다. 눈물을 감췄다. 칠칠맞은 모습은 보이기 싫었나 보다.

우린 결승선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며 이 여운을 조금 더 간직해보기로 약속했다.


혹자는 말한다. 10km가 뭐 대단한 거냐고, 그게 큰 일 한 거냐고. 나는 대답한다. 적어도 내겐 특별하고 큰 일이었다고. 그저 모든 순간에 감사했다고.


모든 순간 행복할 순 없다.

하지만, 행복하다 마음먹을 순 있다.

나의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

소소한 일상에 자기만의 의미를 더하면 행복하다.

마라톤 도전은 그걸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행복한 순간이어서 감사했다.

아니, 모든 것이 감사해서 행복했다.


내 몸은 분명 10km를 달리고 끝났지만,

마음의 행복은 여전히 달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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