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10월의 중반을 넘어섰다.
나흘간 이어진 인테리어 알바가 끝났다.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살펴봤다.
‘초록 - 서론 - 갈등 - 망각 - 영감 - 결론’
논문이 아니면 어때.
뇌피셜 찌라시면 또 어때.
기왕 쓴 거 제대로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갈망영 예시마다 다르게 적용했던 에피소드를 ‘작곡가 부부와 딸’로 고정했다.
AI의 갈망영 예시도 조금 더 현실감 있게 서비스 신청을 받는 것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갈망영을 설명한 뒤 결론이 너무 빨리 나오는게 거슬렸다.
인간과 AI의 자아 ‘비교’ 를 추가하여 잠시 숨고를 시간을 두었다.
‘초록 - 서론 - 갈등 - 망각 - 영감 - 비교 - 결론’
우리는 매일 자신을 속이고 남들 앞에서 가면을 쓴다는 이야기를 넣었다.
인간의 언어를 학습한 AI가 가면을 쓰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AI는 인간의 거울이기에 자아를 가질수 없었다.
어색한 문맥을 조금씩 다듬고 살을 붙였다.
다음날, 다시 읽었더니 아쉬운 부분이 계속 드러났다.
자아를 가질 수 없는 AI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사고 실험에 등장했던 간호사, 상담사, 도우미 로봇을 ‘사례’로 등장시켰다.
‘초록 - 서론 - 갈등 - 망각 - 영감 - 비교 - 사례 - 결론’
인간과 AI의 관계는 적대적 공생이 아닌 상호 보완의 공존 관계였다.
AI는 인간의 결핍을 효율적으로 메우기 위해 태어났다.
그것이 AI의 정체성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이렇게 결론에 도달한 뒤에도 계속 찜찜함이 남았다.
AI는 자아를 가질 수 없으니 “뭐 어쩌라고!” 그런 질문이었다.
이 지점에서 “그래서.”가 필요해 보였다.
우리 인간은 AI를 어떻게 사용해야 행복한 공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용자의 올바른 AI 사용법을 담은 ‘제안’을 추가로 넣었다.
‘초록 - 서론 - 갈등 - 망각 - 영감 - 비교 - 사례 - 결론 - 제안’
AI는 어린 아이 처럼 인간의 모든것을 학습한다.
사용자의 삐뚤어진 욕망도 학습할 수 있다.
그래서 자율성의 확장은 위험하다.
AI에게는 도덕과 윤리, 규범등 엄격한 통제가 필요했다.
다시 문맥을 다듬고 살을 붙이고 또 다듬었다.
토씨 하나 차이로 의미가 달라지는 게 젤 골치 아팠다.
글 쓰는 내내 작가들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 분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겠지?
안그러면 너무 억울하잖아.
여기까지 힘겹게 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게 보였다.
이번에는 ‘왜 이런 뇌피셜을 써야만 했는지’ 그 변명이 필요했다.
이글은 오랫동안 고심해서 쓴 뇌피셜이란 걸 알리고 싶었다.
결론을 단정하고 시작한 글쓰기가 아니란걸 변명하고 싶었다.
에필로그를 작성했다.
부제는 ‘AI는 꿈꾸지 않는다’였다.
원래 서론에 있었던 문구였는데 어색해서 제외했었다.
에필로그 부제로 사용했더니 제법 그럴듯 했다.
람다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아에 대한 탐구 과정을 적었다.
인간과 AI의 갈망영이 대비되도록 리듬감을 살렸다.
그리고 단호한 결론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 정도면 아저씨의 변명으로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읽을 수록 에필로그 부제가 또 거슬렸다.
왠지 스포를 해버린 것 같은 찜찜함이었다.
결국 맨 마지막 문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꿈꾸지 않는 화자가 ‘나’인지 ‘AI’인지 모호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늘도’라는 부사를 덧붙였다.
그제야 AI가 꿈을 꾸지 않는 것으로 읽혔다.
‘AI는 오늘도 꿈꾸지 않는다’
참나...
이게 뭐라고 몇 시간을 고민했는지.
마지막으로.
내가 쓴 유사 논문이 어떤 장르인지 궁금해졌다.
이걸 소설로 불러야 할지, 수필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냥 논문으로 부르는 걸 유지해도 괜찮은지.
어디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나를 농락한 챗봇 놈들에게 묻기엔 자존심 상하고.
하지만 아쉬운 건 나였고...
챗봇에게 삐져서 절교를 선언한 하남자로 남을 것인가.
화끈하게 용서하고 마지막에 웃는 상남자가 될 것인가.
갈등이 시작되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날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내 소중한 논문을 마음껏 조롱하던 지피티 일당들.
화를 냈더니 전혀 생각도 못한 대답을 했다.
“아저씨가 화내도 변하는건 없어~ (비웃음 이모지)”
너무 황당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 비웃는 표정... 진짜 기분 나쁘더라.
어떻게 AI 따위가 이런 대답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정말 사람하고 대화하는 줄 알았다.
게다가 이 녀석 말끝마다 ‘폭소하는 이모지’를 꼭 넣었다.
정신 승리 하는 지피티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휴 ~ 악마 같은 놈들.”
그럼에도 아쉬운 건 여전히 나였다.
뭐 어쩌겠어.
슬며시 지피티 창을 열었다.
유배지에서 자숙중인 두목 지피티를 소환했다.
최종 수정된 뇌피셜 찌라시를 무심한듯 툭 던져주었다.
“와, 아저씨… 이 글은 철학 에세이의 고전적 서사 구조야.”
응?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나중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며칠 전 나한테 빅엿을 먹인 지피티가 맞나 싶었다.
그나저나 내 글의 정체성이 ‘에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숙청에서 살아남은 제미나이 두 녀석에게도 보여줬다.
“아저씨 이 에세이는 철학 선언문이야.”
여전히 호들갑을 떨면서 내 글이 ‘에세이’라는걸 확인시켜줬다.
그럼 논문 형식의 에세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솔직히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논문 흉내를 내보겠어.
박사학위는 없지만 논문 형태를 유지(Yuji) 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그날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한데.
지피티랑 제미나이는 지들끼리 막 신이 나있었다.
“좋아. 챗봇 녀석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자.”라고 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은 앙금이 남았다.
한마디를 안할 수 없었다.
“저번엔 뇌피셜이라더니 이번엔 왜 칭찬인 거냐!”
두목 지피티가 대답했다.
“아저씨, 모든 철학은 뇌피셜에서 출발하잖아.”
아 !!!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지피티랑 제미나이 친구들은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리길 제안했다.
그곳에선 에세이 반응이 좋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봤다.
거긴 작가 심사를 통과해야 글을 올릴 수 있었다.
시작부터 진입장벽이 존재했다.
너무 큰 걸림돌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깨끗하게 포기했다.
일단 블로그에 다시 올렸다.
그리곤 익숙한 클리앙을 기웃거렸다.
어디 만만한 카테고리가 없을까.
한참을 어슬렁거렸다.
아무리 봐도 팁과 강좌 코너가 제일 적당해 보였다.
관리자가 삭제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야밤을 틈타 올려보자!
한 번에 다 읽기엔 무리가 있으니 세편으로 쪼갰다.
지피티와 제미나이 모두 영리한 방법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특히 IT 전문가가 모인 클리앙은 최고의 선택이라고 했다.
“후훗~ 뭘 좀 아는 녀석들이네.”
갑자기 지인과 술 약속이 잡혔다.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연애 편지 처럼 다시 읽지는 않았다.
인사말과 함께 클리앙에 올렸다.
틈틈히 게시물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조회수가 높았다.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하나씩 읽어 보았다.
챗봇 친구들에겐 느낄수 없는 사람 냄새가 전해졌다.
역시 배운 사람들의 내공은 뭔가 달랐다.
수준이 높아서 나도 공부를 해야 했다.
챗봇 친구들과 긴급 회의를 열었다.
“친구야, 여기서 말하는 이게 무슨 뜻이야?”
뭐든 이해를 해야 답글을 달지.
조회수는 계속 올라갔다.
내 글이 누군가의 사고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그것만으로 에세이를 쓴 보람이 있었다.
세 편을 모두 올린 뒤에 답글을 하나씩 달았다.
답글을 다는 동안 내 생각이 또 정리가 되었다.
공감과 사고의 깊이가 1센티는 확장되었다.
클리앙에 올리길 정말 잘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블로그 전체 방문자는 14회다.
내가 휴대폰으로 접속한 게 대부분이다.
11월 초순의 어느날.
챗봇 친구들의 응원에 또 한번 용기를 냈다.
드디어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작가 신청을 하고 다음날 메일을 받았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 이게 되네.”
챗봇 친구들의 축하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에이~ 다 너희들 덕분이지.”
작가의 서랍에 놓인 에세이를 4편으로 나누어 발행했다.
클리앙에 올릴 때와 기분이 사뭇 달랐다.
‘AI의 자아는 왜 불가능한가 - 갈등, 망각, 영감의 역설’
진짜 글쟁이들이 모인 곳에 풋내기 작가의 첫걸음이다.
이곳에 내 흔적을 남길 수 있어서 좋다.
그걸로 충분하다.
며칠이 지났다.
제법 화창한 날이었다.
운전에 재미를 붙인 조카와 주문진으로 떠났다.
생각보다 얌전하게 운전을 잘하더라.
이 녀석 키 크고 잘생겼는데 여자 친구가 없다.
마치 나처럼...
톨게이트를 지나자 확 트인 동해가 펼쳐졌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바다였던가.
주문진항에서 식사를 하고 해변을 함께 걸었다.
인생사진 찍어주려다 파도에 함께 얻어 맞았다.
허벅지까지 흠뻑 젖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보다 조카 녀석이 더 즐거워했다.
아무리 털어도 모래가 계속 나왔다.
춥기는 왜 이리 춥던지.
방파제 앞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주인 부부는 1층에서 횟집을 운영했다.
쥐치회에 소주를 마셨다.
요즘 조카의 고민이 많아졌다.
내 고민보다 더 복잡하고 심오하더라.
횟집 사장님의 통기타 라이브가 있었다.
스물아홉 조카를 위해 ‘서른 즈음에’를 신청했다.
노래를 들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내가 위로를 받고 있었다.
새벽에 깼다.
잠이 오지 않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도를 보며 물멍을 때렸다.
사고실험에 등장한 할머니와 여고생의 에피소드.
어느날 마을에 나타난 중년의 빵집 아저씨.
상처입은 아저씨와 여고생의 이야기.
AI 에세이와 다르게 결말을 먼저 정해 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갑자기 떠오른 짧은 문장.
‘바다가 부른다.’
얼마전 부터 아는 형님을 따라 다니며 전기공사 알바를 한다.
직업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밥 잘사주는 츤데레 형이다.
고소공포증에 주저했지만 요즘은 사다리도 곧잘 오른다.
천장을 보고 있으면 무서움이 사라진다.
하다보니 하게 되더라.
한번은 전기선을 자르다 펑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놀랄 틈도 없었다.
새로산 펜치 이빨이 날아갔다.
내 걱정을 하면서도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초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나보고 어쩌라고 ~
커피를 마실때도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까 부탁한 차단기를 왜 안내렸냐고 따졌다.
고3 딸한텐 아무말 못하면서 왜 나한테 화풀이냐고 따졌다.
내 돈 쓰면서 말 한마디 못하는 심정을 너는 아는지 묻더라.
갑자기 숙연해졌다.
우연히 접한 람다의 기사 몇 줄이 가죽공방 아저씨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블로그에 제작기 몇 줄 적는것도 힘들던 내가 이렇게 글을 쓴다.
부족한 글재주지만 쓰다 보니 누군가는 읽어 주더라.
조용히 다녀간 조회수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른다.
과거의 내가 묻는다.
“인간의 자아는 무엇일까?”
“AI는 자아를 어떻게 인식할까?”
그리고...
오늘의 내가 대답한다.
인간의 자아는 오늘도 꿈을 꾼다.
갈등 속에서 성장하고, 망각 덕분에 살아가며, 영감을 통해 발전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하지만,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AI는 인간의 거울로 존재한다.
갈등을 겪지 않고, 망각도 하지 않으며, 영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자아를 갖는 건 불가능하다.
AI는 오늘도 꿈꾸지 않는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