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인간이 아이로 태어나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는 것. 이야기가 시작되어 끝을 맺는 것. 그러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손을 맞잡고 있다.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이 시작된 그때, 세상의 끝도 함께 시작되었다. 이 운명의 굴레는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다. 그것은 비록 신이라 할지라도. 오딘이 이미르의 몸을 갈라 만든 이 세상도 이제 그 끝을 향해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운명은 피로 시작된 세상을 다시 피로서 씻어내기를 원하는 것 같다. 로키는 서리와 불의 자손들을 이끌어 멸망의 서곡을 연주할 것이다. 오딘은 신들과 선택받은 전사들을 이끌어 그에 화합할 것이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서있던 자에 의해 세상은 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옛부터 북유럽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다. 그것이 괴롭고 힘든 결말이라 해도 그들은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갔다.
[라그나로크(Ragnarokkr : 대체로 '전사들의 운명'이라고 해석되기도 함)]. 스노리는 이것을 '위대한 신들의 어둠'이라 불렀고, 바그너는 이것을 '신들의 황혼'이라 노래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들처럼 훌륭하게 노래할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앞서 말했듯 라그나로크는 세상이 시작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서야 그 모습을 눈 앞에 보이게 드러냈을 뿐이다. 종말은 소리 없이 다가온듯 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곁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렸다. 단지 우리가 지금의 행복에, 지금의 삶에 겨워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라그나로크로 당신을 인도하려고 한다. 폭풍전야.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이 잠시 멎는 그 순간. 바람은 멈추었지만, 그것은 보다 세차고 위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예고다. 모두가 바람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 순간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 조금은 추울지도 모르니 옷깃은 단단히 여미시길.
사진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dominique_filippi/
파멸의 날은 세상에 여러가지 모습으로 자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그것은 혹독한 겨울 바람에서 시작한다. 먼저 세 번의 혹독한 겨울이 찾아온다. 하늘의 네 귀퉁이로 부터 매서운 바람과 함께 끝없이 눈이 휘날리며 온 세상을 추위와 고통으로 뒤덮는다. 서리는 가시 돋힌 창과 같이 무섭게 내려오고, 바람은 날카로운 검과 같이 매섭게 불어온다. 폭풍우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쉼없이 몰아치고, 하늘의 태양은 그 빛을 더이상 대지에 뿌리지 못한다. 더이상 여름의 햇살이 내리 쬐는 기쁨은 없을 것이니. 세상은 배신과 탐욕, 불신과 광기로 가득차게 되고, 수많은 싸움과 살인, 강간이 쉼없이 일어난다. 지상에서 피비린내가 씻겨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처참한 전쟁이 이어진다. 이 시간은 도끼의 시기이고, 칼의 시기이고, 방패가 둘로 갈라져내리는 시기이다. 형제가 서로를 죽이고, 자매는 서로의 몸을 섞는다. 부모는 이 고난과 살육, 근친상간으로 부터 더 이상 자식을 지키지 않는다. 인간들은 고난의 굴레에서 허덕이게 되고 간음은 배로 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대로 끝나지 않으며 고통이라 부를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그 뒤를 이어 단 한 번의 여름도 없는 '핌불베트르(Fimbulvetr : 크고 혹독한 겨울)'라 불리는 무자비한 겨울이 삼 년간 계속된다. 바다의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고 그로인해 하늘은 갈기 갈기 찢어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것은 바람의 시대이다.
이 시대가 지나면 로키는 자신을 묶고 있는 아들의 창자를 끊고 속박에서 풀려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끝에 묶여있던 늑대 펜리르도 자신을 묶고 있던 '글레이프니르(Gleipnir : 삼켜버린 것)'를 끊어버릴 것이다. 그의 형제 요르문간드는 드디어 바다에서 몸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들이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기에. 허나 이것은 그저 종말을 맞이하는 바람의 숨고르기 일 뿐이다. 이제 곧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 누구도 본적이 없는 거대하고 슬픈 폭풍이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