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발걸음-전
그는 헐벗은 몸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아스가르드 외곽에 있는 숲이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외면받은 숲이다. 이 숲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의 이름은 '반(Wan/Van : 희망)'이다. 이 강은 '펜리르(Fenrir/Fenrisulfr : 습지에 도사리는 자)'의 입에서 흐르는 피와 침이 모여 만들어졌다. 겨울이 계속되는 지금은 강도 얼어붙어 었다. 그는 강의 수원지까지 걸어갔다. 그의 눈 앞에 하얀 눈을 이불처럼 둘러쓴 검은 산이 나타났다. 그것은 펜리르였다. 펜리르는 결박당한 상태에서도 천천히 자라 이제는 작은 산만큼 몸이 성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묶고 있던 마법이 약해진 것인지, 운명이 정한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는 펜리르의 앞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그림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눈을 뒤집어 쓴 이 검은 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큭.. 절경이군.]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그러나 펜리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웃음이 멈춘 그는 혀를 한번 차더니 말을 이었다.
[쯧! 알았어. 용건만 말하고 꺼져주지. 너도 이젠 알꺼야. 네가 뭘 해야 하는지. 마침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대상은 너와 같지. 네 애비라고 유세 떨 생각은 없어. 어차피 그런 관계 따윈 서로 불편하잖아? 가서 같이 싸울 놈들을 데리고 오지. 그때 너도 내 쪽에 붙어.]
그는 펜리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구구구~ 이거 나이를 먹는다는 건 좋은게 아니군. 몸 여기저기가 말을 잘 안듣거든.]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따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한참 뒤, 검은 산이 꿈틀거리더니 산의 한쪽을 덮고 있던 눈이 쏟아져 내렸다. 눈이 쏟아진 자리에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눈동자는 그가 사라진 쪽을 향해 있었다. 눈동자는 마치 '그 다음은 네놈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더이상 헐벗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의복을 갖춰입고 있었고, 두건이 달린 두꺼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미드가르드의 바닷가였다. 긴 겨울은 바다마저 얼리기 시작했다. 육지와 맞닿은 얕은 바다는 이미 꽁꽁 얼어붙어 바다 안쪽까지 해안선을 밀어올렸다. 그는 그는 자갈로 가득한 해안을 가로질러 얼음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해안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손에 들린 나무지팡이가 얼음을 짚는 소리였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해안의 끝에는 아직 얼지 않은 바다가 있었다. 그곳은 수심이 깊어 아직 얼어붙지 않았다. 그는 들고있던 나무지팡이의 한쪽 끝을 가만히 바닷물 속에 넣었다. 그는 지팡이 끝에서 바닷물이 천천히 움직이며 퍼져나갔다. 바다에는 파도가 거의 없어 그가 일으키는 잔물결이 바다 위로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퍼져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반대쪽에서 작은 파도가 밀려와 그가 일으키는 잔물결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피식거리면서 웃었다.
[알아. 거긴 지겨운 곳이지. 그리고 지금의 너에게는 너무도 비좁은 곳이지.]
그는 천천히 팔을 움직였고, 바닷물에 잠긴 지팡이의 끝부분이 다시금 물결을 일으켰다. 이전과는 달리 물결은 파도라고 해도 좋을정도 크게 퍼져나갔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용건은 하나야. 네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같아. 가서 같이 할 놈들을 데리고 오지. 그때 이쪽에 붙어. 너도 이제 너의 이름처럼 살아야하지 않겠어?]
그의 지팡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딱딱거리며 그의 지팡이가 얼음에 부딪히는 소리가 해안가에 울려퍼졌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바다 속에서 녹색 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거대한 두개의 눈동자였고, 각각이 마치 하나의 섬만큼 컸다. 잠시 뒤, 이 거대한 녹색의 눈동자는 바닷속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눈동자의 주인은 미드가르드의 뱀으로 불리는 '요르문간드(Yormungandr : 대지의 지팡이)'였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그의 형제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그의 형제들 모두 그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는 그런 시선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여있는 거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고난이 묻어나고 있었다. 긴 겨울은 거인들에게도 춥고 긴 고난을 선사했다. 그들의 조상들은 서리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의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과는 달리 이처럼 긴 고난의 겨울을 힘들게 버텨내고 있었다. 요툰헤임은 그 대지의 대부분이 이미 눈과 얼음에 뒤덮여 제 아무리 거인이라 할지라도 살아갈수 없는 곳이 되었다. 살아남은 거인들은 비좁은 지역에 몰려들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방문이 달가울리 없었다. 그는 경멸과 불신의 시선으로 가득한 복도 한가운데를 지나 높은 곳에 앉아있는 거인들의 왕, '흐림(Hrymr : 늙은이라는 뜻으로 여겨짐)'을 향해 걸어갔다.
- 거인, 고야 그림(1808로 추정, 출처 :https://sv.wikipedia.org/wiki/J%C3%A4tte)
[이야.. 오래 살고 볼일이군. 이런 애송이가 유일하게 남은 거인들의 왕이라니.]
그의 말에 흐림 주변에 있던 거인들이 분노했다. 그들의 분노사이로 차갑고 날카로운 살기가 가득하게 피어올랐다.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흐림을 보았다. 흐림이 손을 들어 분노하는 거인들을 진정시켰다. 흐림이 그에게 말했다.
[말하라.]
[할 말은 하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모두 알고 있을터. 설마 이제와서 이걸 피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없겠지.]
그는 주변의 거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에 좀 전의 분노하던 모습과는 달리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차갑게 웃었다.
[카하하! 할배요! 이 멍청한 것들이 그대의 후손이라오! 아! 한심하디 한심한 것들이 그대의 자손들이라오! 이미르! 대체 당신의 손과 발을 어떻게 놀렸기에 이런 모지리들만 살아남았다는 말인가!]
그는 크게 웃었는데, 그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그의 조소에 거인들은 분노보다도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그가 큰소리로 말했다.
[흐림! 나의 형제들에게 고한다! 세상은 이제 끝이다! 모든 것이 끝이다! 그러나 이 끝은 우리의 무대가 될 것이다! 이 끝은 우리 서인 거인들의 복수로 마무리 될 것이다! 이것은 운명이다! 이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의 외침에 흐림과 거인들은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멸망의 징조가 나타난 이후, 거인들도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발휘했다. 그것이 합법적이건, 비합법적이건.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건 빼앗았고,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죽이고 파괴했다. 그것이 가족과 혈육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거인들은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이다.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자부심보다 훨씬 커다란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지녔다. 그는 언제나 불화와 재앙을 몰고오는 자였으나, 지금 그의 외침은 거인들이 살아남은 것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어차피 세상은 끝이다. 자신들이 살아남은 것은 바로 이 세상의 끝을 복수로 완성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것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운명임을 다시 깨달았다. 흐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 신들을 끝장을 내야지. 이미 많은 이들이 운명의 부름에 참여했어. 난 그들 중 하나일뿐이지. 흐림! 넌 살아남은 거인들을 모조리 모아 아스가르드로 향하는 바닷가로 가.]
[언제까지 도착하면 되지?]
[되는대로. 어차피 이건 운명이 이끌음이라서. 땅과 산이 흔들리고, 나무는 뿌리까지 찢어지는 날. 산은 무너져 내리는 날. 그날 그곳에서 너희를 운명의 들판으로 태우고 갈 배를 만날꺼야.]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렸다. 흐림이 그를 다시 멈춰세우며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는거지?]
[나? 마지막 동맹군을 데리러. 서둘러. 운명은 나보다 인내심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는 자신의 들어온 홀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말한 마지막 동맹군을 깨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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