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한때 나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누군가. 그 얼굴이 불쑥 떠오르자 분노가 치솟았다. 솔직히 말하자면—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진심이었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이 문장을 그대로 남긴다. 어쩌면 나는 뉴스에 나오는 살인범과 다르지 않다. 다만 나는 행동에 옮길 용기가 없고, 행동력이 없을 뿐일 것이다.
이것이 나다.
분노, 질투, 살의, 우월감. 이것들이 날마다 내 안에서 올라온다. 그리고 그것들을 없는 척, 괜찮은 척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교양이고 체면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죄인이다. 죄인 중의 죄인이다.
항상 기쁨에 차서 일하던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그런 기쁨이 모두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게되었다. 늘 궁금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기에 나에게 기쁨이 송두리째 사라졌는가. 그 이유를 한참 뒤에야 알았다.
나는 내 안에 '자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이 정도는 받아야 해. 나는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어. 나는 이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나를 짓누른다. 그것이 충족되면 오만해지고, 충족되지 않으면 분개한다. 어느 쪽이든 쉼이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무거운 짐'이 이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믿음, 나는 이 정도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확신. 그것을 내려놓고 그분께로 가면 쉼을 얻는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비로소 피부에 닿았다.
마태복음 5장 3절은 오래된 수수께끼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나는 이 구절을 늘 이상하게 읽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가. 가난은 결핍이 아닌가.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 '가난함'이 자격 없음을 아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기대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 모든 것이 선물로 다가오는 사람. 그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에, 받는 모든 것에 감사한다.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모든 것이 경이롭다.
나는 그랬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다.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진짜로 받아들이면,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의 죄가 보인다. 나에게 배은망덕하게 굴었던 사람, 간사하게 행동했던 사람, 나를 밟고 올라간 사람. 그들을 미워하던 마음이 서서히 다른 것으로 바뀐다. 안타까움. 그들도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게 의지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용서하겠다고 마음먹어도, 그 얼굴이 또 떠오르면 분노가 다시 올라온다. 그것이 반복된다. 의지로 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일찍 죽은 형 마르켈을 회상한다. 결핵으로 고통 속에 있었던 그 형은, 놀랍게도 늘 기뻐했다. 그가 기뻐한 이유는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새소리도, 창 너머 햇빛도,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도 모두 자신이 받을 자격 없는 선물임을 알았다. 그가 죄인임을 알기에, 받는 모든 것에 감격한 것이다.
용서는 목표가 아니었다. 자격 없음을 아는 깊이가 깊어질수록, 용서는 결과로 따라왔다.
그리고 비로소 기도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 예전에는 그런 기도가 위선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그런데 내가 죄인임을 알고 나면, 그 기도가 낯설지 않다.
우리는 결국 같은 처지다.
'어여쁘다'는 말이 있다.
이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참 많은 마음이 담겨 있다. 사랑스럽고, 예쁘고, 불쌍하고, 안타깝고. 그 모든 감정이 한 단어 안에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될수록, 자격이 없음을 깨달을 수록, 세상이 어여쁘게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유를 다시 생각해봤다. 그것은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배우기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안타까워서. 말하고 싶은 것을 적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 마음이 세상을 바꾸는 발명이 되었다.
제품도 마찬가지다. 진짜 좋은 제품은 사용자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들의 불편함이 안타까워서, 그들의 기쁨을 바라서. 그 마음이 형체를 갖추면 제품이 된다.
사소한 제품 하나에도 그런 마음이 담겨 있다면,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은 어떨까. 그분이 어여삐 여기시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오늘 나는 또 분노했고, 또 죄인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을 받았다는 걸 알면, 감사할 것들이 보인다. 나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의 시작은 거기에 있었다.
자격 없는 자임을 아는 것. 그것이 행복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