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가 다 돌아간 거 같은데 내가 빨래를 널어줘도 될까?“
상점이 문을 열려면 시간이 좀 남아서 숙소로 들어왔더니 역시나 아무도 없다.
누군가 체크아웃을 한 모양이군.
발코니의 세탁기에 빨래가 한가득이다.
지금 널어야 저녁에 걷을텐데.
초조해진 나는 끼아라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그렇게 해주면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빨래줄에 남의 빨래를 넌다.
그래봐야 시트, 수건, 베개커버들이니까.
수건이 3, 시트가 2, 베개커버가 3.
그 이탈리아인 커플과 싱글룸 아저씨가 다 체크아웃한걸까?
정체를 알 수 없던 싱글룸의 손님은 어제 아침 조우했다.
다소 난감한 모습으로.
(하지만 재밌었어 )
이 집에서 주방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 뿐인건지,
어제 아침을 준비하며 달그달거리고 있는데,
Ciao! 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머!
나는 비너스인 줄 알았잖아.
상의탈의하고 하반신만 수줍게 타올로 감싼 중년의 남자가!!
자기가 욕실을 좀 써도 되겠냐고 묻는데,
굳이 저한테 허락받을 필요는 없으신걸요….
그냥 조용히 지나가시면 될 거 같은데….
0.01초,
이 인간이 변태인가? 의심했지만
금방 그 의심을 걷어들인 건
너무 난감해하는 사슴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거기다 수줍게 타올을 가슴팍에서 나름 그러쥐고 있었거든.
포즈가 정말 딱 이랬음.
물론 긴 머리카락 대신 큰 타올로 나름 가릴 곳은 다 가리긴 했다.
아마 ‘아침일찍이니까 아무도 없겠지?’
타올만 맨몸에 두르고 방 밖을 나섰다가,
주방에 왠 동양여자가 있는 걸 보고,
자기가 먼저 씻는다고 말은 해야할 거 같아서 그랬을거 같아.
(좀 늦게 씻긴 하더라. 한 30분 넘게 안 나와서 피부껍질 벗기는 줄)
화장실은 2개지만 샤워부스는 한개뿐이라,
5명이서 같이 써야 하니까.
잠깐 당황은 했지만 내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
양인이라 그런가,
수염이며 가슴팍의 털이며 고슬고슬 갈색이라서
나는 그냥 남자사람을 본다기 보다는
커다란 대형견을 보는 느낌이랄까?
좀 통통한 리트리버…. 삽살개….같은.
아무튼 세탁된 시트를 보니 그가 체크아웃한걸까?
오늘 아침에도 또 혼자 아침 먹는다고 7시부터 달그닥거리는데 (나는 아침 6시에 샤워를 다 했지!)
오늘도 왠 남자 하나가 발코니에 나가서 한참을 안 들어오길래,
(주방을 가로질러 발코니로 나가는 구조)
내가 주방을 너무 오래 썼나? 나 나오기만 기다리나?
빼꼼 내다보니,
오마나~~ 세상에~~~
책을 읽고 있네~~~
핸드폰 토독거리거나 담배 피우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
이탈리아 남자는 아침에 발코니에서 책을 읽어!
어제 그 비너스를 자세히 못 봐서
(가슴팍의 털과 수염만 보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서 얼굴이 기억 안 남)
저 책을 읽는 남자가 그 비너스인지, 아님 커플남인지 모르겠다.
둘 다 양인에, 갈색머리, 턱수염이 있어서 그 놈이 그 놈같다.
오후에 선생님과 박물관 이야기를 하다가,
“아.. 거기 있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지만 저는 거기만 가 봤는데 자수는 못 봤거든요, 이름이 뭐더라… 거기.. 피렌체에서 제일 유명한 박물관이요, 이름이
뭐더라?“
“그래, 거기! 나도 이름이 기억 안 나지만… 아… 거기.. 세계에서 젤 유명한 데,,, 거기, 근데 거기 말고 다른데 거긴 자수가 많아, 거길 가봐, ”
‘거기’와 ’거기 말고 저기‘ 박물관 사이에서
둘 다 머리를 쥐어 뜯다가,
결국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검색해보고 나는 외쳤다.
우피치!!!
(검색어-피렌체 박물관)
“맞아맞아, 우피치.
거기 말고 자수 많은 다른 박물관은 내가 찾아보고 메세지로 보내줄께. 거기는 꼭 가봐야 해.“
박물관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제 아침의 비너스의 탄생이 생각나길래 써 보는 이야기.
나는 이제 우피치하면
이 턱수염 비너스가 먼저 떠오를 거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