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윤범 Mar 16. 2023

74층 아파트의 삶



봉준호 감독의 일곱번째 장편 '기생충'은 그야말로 한국 영화의 새 역사를 썼다 할 수 있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 됐고, 곧이어 오스카의 트로피마저 손에 거머쥐게 된다. 동시에 그는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한국영화 최고의 감독이 되었다. 나는 늘 그가 최고의 영화감독이라 생각했지만, 하지만 그 혼자 최고의 영화감독일 수는 없었다. 영화감독들은 모두 자신이 연출한 영화가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내 아이는 상도 못 받고 1등도 하지 못했지만, 그렇지만 내게 가장 자랑스러운 아이는 내가 낳고 기른 내 자식일 테니 말이다. 나는 영화감독 봉준호가 자신이 낳은 일곱 번째 아이를 통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했다 믿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차이를 다룬,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적인 공기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박 사장은 부자이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가 아니었고, 그건 기택의 가족 역시 그랬다. 그들은 완전한 지하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빛이 드는 반지하에 사는 가족이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박 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나고 폭우로 인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며 벌어지는 해프닝이었지 않나 싶다. 그 해프닝의 전과 후로 기택의 가족은 극단적인 평화로움과 혼란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기정은 기우가 건넨 값비싼 물을 마시며 욕조에서 TV를 보지만, 그러나 그녀에게 진짜 어울리는 모습은 홍수로 물바다가 된 집 화장실에서 변기 뚜껑을 닫고 담배를 태우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우리 삶이 74층 아파트의 삶과도 같다 여겨진다. 1층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야 하고, 또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하며, 윗집에서 쿵쿵대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자신들은 풀 곳 없다는 것을 안다. 74층 사람들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위에서 쿵쿵대는 소리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1층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홍수에 좌절하지만, 그러나 그들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아예 집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 사회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더러운 일을 해야 하며, 1층에 사는 사람들은 하수구 냄새와 자동차 매연, 담배연기까지 있는 그대로 감당하고 살아야 한다. 74층 사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산과 바다를 보며 아름답다 말하고, 그러나 그들은 높은 기압에 시달려 귀가 먹먹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소득의 수준은 삶의 현실을 말해준다. 더 많은 시달림과 압력 속에 사느냐, 아니면 조금 더럽더라도 귀가 먹먹하지 않은 곳에 머무르느냐 그 차이일지도 모른다. 74층 사람들은 아파트 모든 사람들의 원망을 들어야 하는 위치일지도 모르고, 그들은 홍수에서 자유롭지만 자신들이 흘려보낸 더러운 물은 모든 층의 가구를 통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층 사람들은 자유롭다. 그들이 흘려보낸 더러운 물의 실체는 오직 땅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수는 74층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작스레 날라든 해고 통보, 그러나 그건 그들의 선택이었다 할 수 없다. 12층 사람들도, 26층 사람들도 아니었다. 누구도 누군가의 삶을 바꾸지 못하고 결정짓지 못하기에 그렇다. 기택의 가족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너무도 뻔뻔해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일까. 그러나 그들이 스토리를 이끌었고 그들이 이 사회의 공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여전히 땅 아래에 살며 계단의 불을 밝히고, 또는 냉장고에 있던 음식을 꺼내 가 미스터리를 창조해 내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펜트하우스의 남자는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74층 사람들이 발자국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는 그 집 사람은 말이다. 그곳에는 영화감독이 있다. 혹은 나 같은 소설가, 작가가 있는지도 말이다. 언제나 땅 아래에 사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 진정한 미스터리는 지하실에 있다 믿는 삶을 사는지도 모르는. 나는 내 언어의 뿌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짐작한다. 아직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꺼내 이야기할 때 나는 점점 그것에 다가서는 기분이 들어 기쁘다. 

작가의 이전글 터미널의 노동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