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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 Mar 20. 2023

Seoul



2006년, 우리나라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건 바로 서래마을 영아 살해 유기 사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은 우리 경찰의 수사력을 증명한 사건이 되기도 했다. 어느 집 냉장고에서 두 구의 영아 시체가 발견되었고, 서래마을에 거주 중이던 한 프랑스인 부부가 용의선상에 올랐으며 그 사건의 범인은 결국 부인 베로니크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나는 그로부터 몇주 후, 몇 개월 후였나 서울에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새로운 시도였던 영상 기사를 만드는 아르바이트에 지원해 면접을 보기 위해 서초구에 있는 한 건물을 찾았다. 그러나 내 목적은 서래마을에 가는 것이었다.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었고, 동사무소에 들어가 이곳이 서래마을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그 동네를 거닐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수년이 지나 대한민국 사회를 살며 느끼게 되는 것은 그런 사건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서래마을에서부터였다는 것이었다. 임신거부증을 가진 한 프랑스인 여자로부터,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도 프랑스라는 국가로 떠나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로부터 17년만인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처음 느낀 그 동네의 분위기가 잊히지 않는데, 그곳은 서울이었음에도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점들이 있었고 길가에는 잉글리시 쉽독 한 마리가 앉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인들이 길을 걷는 모습에 눈동자가 흔들렸으며,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꽤나 어색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그들 모습이 되어 있는 듯했다. 한 젊은 여자가 예쁜 헬맷을 쓴 채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있었는데, 피자 집에 외식을 나온 가족들의 모습에 나는 끝내 우리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방배동인지 반포동인지, 아무튼 나는 그곳 서울에 있었다. 미세먼지 가득한 날, 그러나 그것에도 적응이 됐는지 더 이상은 크게 힘들지 않은 봄의 어느 날. 그리고 카페 드 리옹, 그랬다. 그곳은 프랑스인들이 사는 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한 곳 서래마을이었다.



여행은 힘들다. 특히 서울 여행이 그렇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눈이 어지럽고, 계단과 통로를 지나며 정신없이 걸어야 하고 버스 번호를 보며 찾는 일은 까마득하기만 한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믿는 것은 언제나 감각이었기에. 발이 움직이는 대로 가라! 그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한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일이 새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러나 지금 보면 그런 화질 그런 영상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될 정도이니. 나는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안다. 서울은 늘 새로운 세계였다. 지난 여행 때 문득 명동의 한 백화점 건물을 보며 저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게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 타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신세계 백화점 본점이 있었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도 그곳이 그리 대단한 곳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지나고 보면 내가 엄청난 곳에 있었구나라는 것을 느끼지만, 회현역에서 연결된 구시대의 통로와도 같은 곳을 거닐며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문을 열어 백화점에 들어섰을 때 나는 큰 감동을 얻고야 말았다. 일본인들의 냄새가 느껴질 듯했고, 서양의 세계를 향한 그들의 감정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만 같았다. 나는 일본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때로 그들을 향해 분노해야 했고 그들을 증오하는 감정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감동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건물 가운데에 계단이 있고 좁고 낮은 건물 안을 걸으면서 이곳이 내 취향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최고의 백화점에 왔구나, 물론 다시 문을 열었을 파리의 Samaritaine에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메종, 부띠끄, 엘레강스. 프랑스어는 참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 입을 보고 몇 년을 살면 그 언어가 어느 지방의 방언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오뜨 꾸뛰르.. 어따 갖다대유?





명동에는 외국인들이 엄청 너무나도 많다. 늘 많았다. 지금도 많더라. 그러나 중국 대사관 앞에서 그 모든 북적대던 감정은 고요해지기만 했다. 그 크고 높은 벽과, 그 지붕을 보며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몇 초 동안 그 지붕을 주시했다. 한편으로는 서초동 사랑의 교회 규모와 예배를 위해 몰려드는 인파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기도 했는데, 그건 명동으로 오기 전, 대검찰청 건물 한 번 보겠다며 도로 가에서 카메라를 들었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도시에 살면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 사회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 국가에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곳에 살면 어쩌면 그것에 무감각해질지도 모른다. 서울 사람들은 놀랍고도 경이롭다. 휩쓸림의 위험에 그렇게 항상 노출된 채로 살며 버텨내어 산다는 것이 말이다. 자신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져 있을 테고, 누군가는 자신이 변했다며 원성하기도 할 텐데 말이다. 번화한 곳에서 벗어나면 이곳도 부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했다.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서울말을 썼는데,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였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원래의 언어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서울에 갈 때마다 그곳 모든 사람들의 출신을 의심하고는 한다. 차라리 외국어를 말하면 안심할 정도로 말이다. 아임 낫 프롬 애니웨어.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디로든. 어디에서 온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어느 곳으로든 다시 떠날 텐데 말이다. 나를 찾지 않는 곳으로,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아주 먼 곳으로. 살며 여행을 하며 느끼는 것은 먼 곳으로 가면 갈수록 지금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과거와 미래는 점점 가까워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는 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서울의 새로운 과거를 보았고 또 새로운 미래를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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