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가 적성에 안 맞는 사람 - 5
꿈꾸던 일상 4. 나만의 아늑한 공간 꾸미기
신규발령 첫 해인 24살, 나만의 공간을 처음 마련했다.
경기도 외지 시골마을에 위치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35만원, 9평짜리 원룸이었다.
바로 전년도까지만 해도 대학교 기숙사에서 세 끼 식당 밥 먹고, 직원분들이 청소해주시는 욕실과 화장실을 쓰며 살았다. 내 책상과 침대 주변만 간단히 정리하면 끝이었다. 옷 빨래도 기숙사 세탁실에서 내 옷만 하면 됐다. 이부자리는 매 달 부모님 집에 갈 때 들고 가 새것으로 바꿔왔기에 이불빨래 또한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계란후라이조차 혼자 해본 적 없이 해맑게 지냈다. 그러다가 나 혼자만의 공간에 갑자기 떨궈진 느낌이었다.
스물네살의 사회 초년생에게 원룸은 '아늑한 집'이 아니라 '자취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작은 공간이어도 내 취향대로 아늑하고 편안하게 꾸밀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당연히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나만의 아늑한 공간을 그리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았다. 학생들을 처음 가르치다보니 실수투성이라 학교에서 우왕좌왕하다가 퇴근시간이 다 돼버렸다. 그제서야 허겁지겁 업무를 마무리하고 저녁먹을 시간 즈음 헐레벌떡 퇴근했다. 2010년도 그시절 시골학교에서는, 저녁시간에 신규 선생님이 혼자 집에 가는 것을 선배 선생님들께서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다. "닭갈비에 소주 한잔 하지?"라는 멘트를.. 안주 메뉴만 바뀌며 거의 매일 들었고 이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저녁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면 멍하니 인터넷 쇼핑만 했다. 옷의 품질을 볼 줄 모르고 화려한 디자인에만 매혹되던 그 때 저렴한 옷들을 참 많이도 사들였지만 늘 입을 게 없었다. 작은 비키니 옷장에 그 조악한 옷들을 다 넣지 못해 의자에, 침대 위에 쌓아두었다. 좁은 원룸이 더 혼잡스러워졌다. 혼잡스러워질수록 원룸은 아늑하지 못하고 잠만 자는 공간이 됐다. 원룸에 남아 있기 싫어 덜컥 차를 사 시내에 자주 나갔다. 헬스장에 다니고 옷가게를 구경하고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분명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자꾸만 진이 빠졌다.
신규발령난 학교를 떠날때 쯤이 돼서야 진이 빠지는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마침 그 원룸을 떠날 시기가 됐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남편과 신혼집을 보러 다니며 기대감에 부풀어 생각했다.
우리만의 아늑하고 행복한 공간을 꾸며야겠다고.
원룸과 다른 24평 아파트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서재를 만들고,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거실에 텔레비전 대신 빔 프로젝터를 설치했다.
하얗게 새로 바른 벽지. 전형적인 신혼부부 침실에는 우리의 웨딩사진을 걸었다.
오래 된 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만의 아늑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이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이 아니다. 나는 한 가정의 주인이 됐다.
내가 주인이 돼 남편과 함께 즐길 요리도 해보고, 예쁜 선반이나 인테리어 소품도 배치했다. 하루하루 우리 부부만의 공간을 꾸미는 것이 재미있어질 무렵, 임신 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만났다.
뱃속 아이를 품고 세 식구만의 단란한 공간을 생각하며 들떴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아기침대, 모빌, 장난감들을 들여놓는다면.. 마치 육아 예능에 나오는 아이들만의 집이 될 것 같았다.
낮은 전면책장을 놓고 귀여운 그림책을 진열해놓는다면.. 꿈에 그리던 책육아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꿈에 그리던 아기자기한 집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들이 많이 필요했다.
아기침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주 갈아줄 속싸개, 이불, 가재손수건들을 넉넉하게 구비했다.
나는 완모할 거니까 젖병과 분유는 필요없을 줄 알았는데 모유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유축기와 젖병, 분유, 젖병소독기까지 필요했다.
월령이 늘어날수록 종류를 달리하며 조잡하게 물건이 많아졌다. 쏘서, 점퍼루, 아기체육관 등등 딸아이가 잘 자고 잘 놀기 위해 뭐가 좋다더라 하는 육아용품들을 야금야금 사들였다. 그 와중에 딸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재우는 데 진이 빠지니 집을 아늑하게 꾸미기는 커녕 기본적인 정리와 청소를 할 틈도 없었다. 간신히 간신히 너무 더러운 먼지와 물떼만 닦고, 온 집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은 방치됐다.
아장아장 기어다니던 딸아이는 걷고, 말하고,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을 다니며 쑥쑥 자랐다. 작년에는 마침내 학교에 입학했다.
3살만 지나면 아기 장난감과 범퍼침대같은 것들 없애고 아늑한 공간을 꾸며보자...
앗, 아직 아니구나. 5살만 지나면 뽀로로유치원, 콩순이집같은 큼지막한 장난감들을 치우고 깔끔하게 만들자..아,, 우리 예쁜 딸아, 거실에 떡하니 자리잡은 미끄럼틀과 트램폴린은 이제 동생들 주면 안 될까? 앗.. 아직 안된다고? 벌써 주면 울어버릴 거라고? 음... ㅠㅠ 엄마가 울고 싶네.
7살이 됐어도 아직 깔끔하지가 않네. 아.. 뽀로로 콩순이 대신 시크릿쥬쥬 인형들과 말하는 티니핑 피규어들이 있구나.. 그리고 유아 놀이책상까지... 에고, 그림그리다가 벽에 낙서까지 해놨네. 그래.. 학교들어가면 저런것들좀 없애자..
딸아이가 학교에 입학하자 조잡한 유아 소품들로 정신이 없던 집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나만의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 꾸미기는 육아를 시작한 순간부터 하나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퇴근하자마자 북카페 같은 거실의 안락한 자리에 하염없이 기대어 재즈음악을 들으며 하루키 소설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8살 꼬마아이의 흔적이 가득한 집에 들어와, 엉덩이 붙일 틈 없이 앞치마부터 두르는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