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가 적성에 안 맞는 사람 - 6
꿈꾸던 일상 5. 끊임없는 배움,자기계발과 성장
나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말재주, 글재주, 손재주가 없었다. 예술적인 감각과 센스 또한 없었다. 순발력이나 공부머리 또한 없었다. 신체운동능력은 평균 이하였다. 게다가 9살 때 앓은 스티븐존슨증후군으로 인해 몸도 아팠다. 하지만 스티븐존슨증후군 후유증이 희미해질 무렵인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조금씩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다.
타고난 공부머리는 없었기에 최상위권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만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이것 하나만은 자신있는 나만의 무기, 바로 '성실함'이었다.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몸이 아플 때 중위권 성적밖에 내지 못했던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그럭저럭 상위권으로는 진입할 수 있었다. 수능점수로 따지면 1등급은 못 되고 2등급 정도 되는 수준이었지만, 경기도 평준화지역의 평범한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그 정도면 인정받을 만 한 성적이었다. 선생님들 말씀을 잘 듣고, 수업태도도 매우 좋았다. 수업 내용에서 100% 출제되는 내신시험에서는 전교 10등안에 항상 들었다. 학교에서 착실한 태도로 칭찬을 많이 받자 학교 안에서의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또한 나를 예쁘게 봐 주시는 선생님들에 대해 나도 큰 호감을 가지며 나는 '교사'라는 직업에 마음이 갔다. 그렇게 사범대학 중 내 성적에 맞는 특수교육과에 입학했다.
수능시험은 어느 정도 공부머리를 요하는 시험이었지만, 특수교육 임용시험은 성실성과 꾸준함을 요하는 시험이었다.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많이 외웠는지를 판가름하는 시험이었다. 대학교 4년 내내 특유의 성실성으로 열심히 공부했던 나는 13대 1이라는 경쟁률을 무난히 뚫고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마침내 2010년, 24살 되던 해에 교사가 됐다.
교사가 되고서도 성실한 건 여전했다. 2년차부터 주말에 특수교육대학원을 다녔다. 퇴근하고 과제를 하고, 전공서적을 공부했다. 내가 원하는 공부였기에 재미있었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적절히 분배해 알차게 활용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그 와중에 운동을 하고 싶어 수영레슨을 다니고 퍼스널 트레이닝도 받아봤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도 또 무엇인가를 계속 배우고 싶었다. 그냥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학생 때와 다르게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자기계발을 한다는 것, 내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활용하고 투자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뿌듯했다. 그래서 영어회화 스터디를 하고, 그 와중에 알게 된 영어 번역학원도 다녔다. 직무연수를 들을 때도 형식적으로 60시간을 채우기 위해 아무거나 원격연수를 수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집합 현장연수를 찾았다. 휴일에, 방학에 쉬지 왜 공부를 하러 다니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배움과 성장에 의한 만족감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배움에 도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28살에 결혼을 하고, 30살에 엄마가 됐다.
수시로 젖을 물리고 이유식을 만들던 시기가 지나고..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다니게 되자 집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멀스멀 뭔가를 배우러 나가고 싶어졌다.
마침 육아휴직중이라 남편의 월급만으로 빠듯하게 지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자 재테크에 관심이 생겼다.
마침 집 근처에서 재테크 강의가 있었다. 고맙게도 딸아이가 잠든 늦은 저녁시간에 이뤄지는 강의였다. 오랜만에 무언가를 배우러 나간다는 생각이 설레는 마음으로.. 간만에 화장도 하고, 원피스를 입고, 부츠도 신고 음악을 들으며 강의장에 도착했다.
강의는 재미있었다. 열심히 필기하며 푹 빠져 듣는데 아주 싸..한 느낌의 진동이 울렸다.
"자다가 깨서 울길래 아무리 안고 달래도 엄마만 찾고 울음을 멈추지 않아..이렇게 많이 울다가는 실신해버릴거 같아.."
....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 자다가 하필 지금 깨버린 18개월 된 딸아이도, 아이 하나 못 돌보고 쩔쩔매서 1시간만에 전화해버린 남편도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재테크 공부는 시작도 제대로 못하고 끝나버렸다.
딸아이가 잠든 시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는 것으로 배움의 욕구를 달래던 무렵, 우연히 부동산투자에 대한 책을 읽었다. 월급 말고도 월세수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부동산투자 스터디 카페에 가입했다. 원격강의도 신청해 딸아이가 잠든 밤마다 열심히 공부했다. 부동산 투자를 위해 임장(직접 방문해 교통과 환경 등 입지조건을 따져보는 부동산 현장조사)을 나가야 했다. 토요일에 남편에게 딸아이를 맡기고 임장을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 하는 임장이다보니 나에게 주어진 몇시간동안 모든 정보를 조사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번 반복해서 나가고 싶은데 남편의 눈치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매 주 토요일 딸아이만 맡기고 임장을 하고 싶어하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게다가 남편은 부동산투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다툼이 잦아졌다. 결국 내 마음대로 진행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지쳐 포기해버렸다. 내가 흥청망청 놀겠다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려는 것이 그렇게 큰 욕심인가. 혼자일 때는 거리낌없이 성실한 태도 하나만으로 척척 해내던 것들인데... 분노와 무기력감에 미칠 것 같았다.
2년간 육아휴직 후 딸아이가 3살 때 고등학교 특수학급으로 복직했다. 중학교에 근무할 때와 다르게 바리스타, 제과제빵 등 직업교과실습의 비중이 컸다. 학생들과 제과제빵활동을 하면서 교사용지도서만 보고 가르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내가 직접 배워 제과제빵기능사 자격증을 따면 훨씬 능숙하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했다. 평일반은 학교 근무 시간이라 주말반 제과제빵 수업을 들었다. 토요일 1시부터 4시까지 이루어지는 수업이었다.
제과제빵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실습할 때 가졌던 의문들이 풀리니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우리 딸은 또래보다 표현언어가 많이 느렸다. 정밀 발달검사 결과 인지발달상의 큰 문제는 없으나 인지, 수용언어능력에 비해 표현언어발달이 원활하지 않으므로 언어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들었다. 언어치료실에 문의하니 토요일 낮시간에야 간신히 수업을 잡을 수 있었다. 언어치료수업 후에는 치료사와 한시간 정도 상담시간도 가져야 했다. 딸아이의 언어치료가 시작되며 네 번 정도 남은 제과제빵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필기시험 공부도 하지 못했고, 실기시험 또한 엄두를 못 냈다. 자격증도 못 땄고 학원 수업도 다 못들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도움은 많이 됐다...라고 씁쓸하게 나 자신을 위로하며 이것도 이렇게 마무리했다.
딸아이가 5살이 되던 무렵 교육과정 수정과 수업 적용에 대한 연수가 개설됐다. 내용도 평소 내가 갈증을 많이 느끼던 것들이었다. 덜컥 신청하고 보니 아산 국립특수교육원에서 이루어지는 4박 5일 합숙 연수였다. 방학 기간이고 남편도 방학이니 이번에는 꼭 다 참여하고 많이 배우고 싶었다. 더불어 정말 오랜만에, 집을 떠나 숙소에서 선생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숙소에서 선생님들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도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았다. 연수 후엔 숙소에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맥주를 마실 생각만 해도 설렜다.
하지만 우리 딸도, 남편도 숙소 합숙은 극구 반대했다. 연수는 신청했으니 어쩔 수 없이 듣더라도 출퇴근하기를 바랐다. 딸아이는 엄마 없이는 못 잔다며 울었다. 어쩔 수 없이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연수장소로 출근해.. 연수를 채 마치기도 전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단한 일정을 5일간 반복했다, 연수 내용은 너무 알차고 많이 배웠지만, 오가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과제도, 선생님들과의 소통도 충분히 하지 못했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 못한 게 아니라 다른 요인들로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또 짜증이 밀려왔다.
누구보다 배우기를 좋아했던 나, 한 번 배우고자 다짐한 것들은 아주 성실하게 끝까지 해내던 나였다.
그런 내 모습에 뿌듯해하고 보람을 느끼던 나였다.
하지만 육아가 시작되며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내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무기력감을 참 많이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