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물장사와 방장사를 하다 보면 인간의 천태만상을 모두 겪을 수 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딛었을 때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당시에는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성선설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던 당시의 나를 설득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경제적으론 빈곤하지만 그와 반비례해 화목했던 가정환경 영향이 컸을 터. 축복이었다.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집은 항상 웃음이 가득했고, 아늑했다. 이 환경에 쭉 노출되며 살아왔기에 무조건적으로 사람은 착할 것이라는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 실수나 오판으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지언정 본성이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조금씩 삶, 세상을 몸소 경험하면서 그때 그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태초의 자아는 순결의 결정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성장 과정의 무수한 경험이 본성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 어릴 적 가정환경, 교우 관계, 사고 등 다양한 요인이 자극하다 보면 본성은 마모될 수밖에 없다. 마모되면서 변형을 거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최초 모양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자아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을 하는 과정에서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경험하고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느끼기도 했고, 이제는 뼛속 깊숙이 각인돼버린 상처를 입기도 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풍파를 겪으면서 가정은 점차 확신이 됐다.
그러다 우연히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친하게 지내던 동네 형이 차린 가게였는데, 취업 준비를 하면서 주말에 일을 도왔다. 그곳에서 우스갯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광경들을 처음을 목격했다. 만취한 사람이 얼마나 주변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 확인했다. 꼭 취한 단골손님만 취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랑의 유형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우쳤다.
이 덕분에 상당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덕분에 현실이라는 개념이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머리로만 상상한 대로의 세상이 결코 아님을 알았다.
이때부터 방장사를 경험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흘렀다. 숙박업소 아르바이트를 고려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년 전부터 숙박업을 하던 죽마고우를 지난해부터 자주 보게 되면서 방장사 체험도 하게 됐다. 이것도 다 코로나19로 한량이 된 덕분이었다. 3평쯤이나 될까? 좁디좁은 사무실이지만 그 안에서 이야기 나누는 게 그리 즐거울 수가 없다.
중학교 때부터 알았던 친구라 언제 봐도 살가운 그런 녀석이었지만, 사업을 하는 그 친구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나나 워낙 치열하게 살다 보니 만나기가 여의치 않았다. 몇 번 만나지 못하고, 그마저도 잠깐 만나서 캔커피 한 잔 하며 안부를 물었던 해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내가 시간이 여유가 되면서 친구가 운영하는 숙박 업소를 종종 가게 됐다.(자주 가기엔 거리가 좀 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시간도 꽤나 걸린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가끔 집중해서 글을 쓰고 싶을 때엔 일부러 부탁을 해 찾아가기도 했다. 친구가 제공해준 방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글을 쓰면 그렇게 잘 써지더라. 시설도 좋아 집에서보다 오히려 여기서 숙면을 취할 때도 많아 여러모로 좋았다.
잠깐씩 들러 몇 시간 담소를 나누다 집으로 오곤 했는데 가는 횟수가 쌓이다 보니 최근에는 일손도 거들게 됐다. 친구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잠깐 내가 카운터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함께 근무를 서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인간의 씁쓸한 단면을 목격하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실제로 눈으로 봤어도 믿기지 않을 기상천외한 일들이 자주 벌어지는 곳이었다. 술자리가 많아지기 시작하는 주중의 끝, 주말에는 더했다. 종종 전해 듣거나 뉴스를 통해 접했던 최악의 사례까지는 보지 못했지, 이미 버거울 만큼 충격적인 일들을 짧은 시간에 겪었다.
친구의 말로는 그 전에도 방을 잡고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었다던데 특히 코로나19로 이런 사람이 많아진 탓도 있다. 비상식적인 행위를 벌이는 사람 대부분이 술에 지배당한 이들이었다. 술을 마시다 복도에 나와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불씨를 제대로 끄지 않아 큰 사고로 번질 뻔했다. 어떤 사람은 집에 가려는 듯이 나와 엘리베이터를 탄 뒤 다른 층에 내려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방문을 열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 방에 묵고 있던 손님이 방문을 잠가놓지 않아 문이 열리고 말았다. 술과 안주를 한 아름 싸들고 와서 문전박대당하는 미성년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했다.
이 사례들은 아주 일반적이고 빈번한 수준에 불과하다. 차마 글로 표현하기 벅찰 만큼 놀라울 일들이 그곳에서는 벌어진다. 이 숙박업소가 근방에서는 가장 시설이 좋은 곳인데, 친구 말로는 열악한 숙소일수록 이런 일들이 더 잦고, 정도도 심각하다고 한다.
이렇게 방장사까지 경험하고 나니 우스갯소리로 여겼던 그 말이 확 와 닿았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도 많아졌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술은 멀리할수록 좋다는 거다. 나야 체질상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도 하고, 술기운이 올라왔을 때의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됐다. 컨디션 관리가 중요한 프리랜서에게 술은 기피해야 할 존재라 확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술에 취한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저러면 안 된다'하는 경계심이 강하게 들었다.
술에 진 사람들, 특히 술버릇이 고약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주변에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함께 사는 가족은 핸디캡을 안고 살아갈 테고, 취객이 지나가는 길에 사물을 파손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심지어 음주운전으로 결코 사죄할 수 없는 죄를 짓기도 한다. 이번 경험은 가능한 한 술을 멀리해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또 하나의 잡념은 '비인륜적인 사건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이다. 그 전에는 그 원인을 찾기가 어려웠다. 과거보다 잦아지고 있다는 우려. 이 거북함이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더 많아진 걸까? 이런 추측만 했을 뿐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수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작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단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쉽게 찾을 순 없지만 그들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모이다 보면 쉽게 물들 수밖에 없을 거다. 코로나19로 이런 이들이 음지에서 모이는 경우가 더 잦아져 불편한 뉴스들이 생겨난 걸지도 모른다. 그들의 잘못된 행실이 더 빠른 속도로 전염되지 않기만을 소원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느낀 건 '아직까지 난 사람의 탈을 벗지는 않았다'라는 안도. 그리고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는, 또는 철저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사수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에 대한 희망. 코로나라는 어둠이 걷히고 나면 이 세상이 과거보다 더 따듯해질 것이라는 바람이었다.
혼란을 야기할 만한 유형들을 접했지만 난 아직까지 그들 발끝조차도 따라간 적이 없다. 그 정도로 인간성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술을 잘 몰랐던 20대 초반 실수가 있었으려나 싶지만 그래도 한계를 넘어선 행위를 한 적은 없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0% 일 때엔 당연히, 지극히 이상 무.
아무리 가슴 저린 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해도 아직까진 인간 냄새 풀풀 풍기는 사람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 덕분에 나 역시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유지하고 있다. 주변의 따스함이 체감될 만큼 줄었다면 나 역시도 아무개들과 비슷한 체취를 뿜어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까진 차고 넘칠 만큼 주변에 인간미가 가득하다.
어쨌든 코로나 시국은 빨리 극복돼야만 한다. 우리 모두, 의료진, 제약회사,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가 노력해야만 그 시기가 앞당겨질 거다. 그렇지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다시 악화되고 있다. 느슨해진 거리두기와 권태를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최근에는 기어코 확진자 600명을 넘어섰다. 쳇바퀴 돌아가듯이 반복되는 양상이 이미 장기화됐다.
비슷한 패턴이 연이어 벌어지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풀어야 할 과제만 더 쌓일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소요가 발생하지 않겠나. 이미 반목과 염증이 극대화된 만큼 이번 유행을 억제해야만 한다.
보복 소비로 요 근래 백화점 매출이 큰 폭으로 올랐단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은 나로서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리지만 그만큼 모두의 마음에 응어리가 한가득이라는 소리겠지.
그저 모든 사람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이겨냈으면 좋겠다. 평범함이 억제된 현재의 삶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건 맞지만, 붕괴된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니까.